본문 바로가기

아시아/2024 년 1월~2월 태국-동남아 크루즈-대만 카오슝

동남아 크루즈 4. 기항지(3) 마닐라, 쿠리마오(비간)

  마닐라(Manila)에 도착해서 아침을 먹고 나오니 밖에서 요란한 타악기 소리가 들렸다. 내려다보니 오늘도 환영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승객들이 아직 하선하지도 않았는데 이들의 공연은 힘차고 흥겹게 이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에 보니 맞은편에 홀랜드 아메리카 선사(Holland America Line)의 웨스테르담 호(Westerdam)도 나란히 입항해 있었다. 이렇게 크루즈 선이 두 대 이상 입항하면 3,000~4,000명의 승객들이 동시에 쏟아져 나올 테니 관광 수입 면에서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가 될 듯하다. 그래서 이렇게 더 열렬히 환영 행사를 하는 건가?

(↑ 환영 공연)

(↑ 배 위에서 본 풍경과 동시에 입항한 크루즈 선 두 대(왼쪽이 노르웨지안 주얼(Norwegian Jewel))

  우리는 항구에서 나와 산티아고 요새(Fort Santiago)까지 30분 정도 걸어갔다. 마닐라에서 가 봐야 할 대표적인 유적지를 꼽는다면 산티아고 요새는 빠지지 않는 곳이다. 이곳은 스페인 식민 시절인 16세기 말 초대 필리핀 총독인 '미구엘 로페스 데 레가스피(Miguel López de Legazpi)'가 필리핀에 새로 건설된 도시 마닐라를 방어하기 위해 만든 성채이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당시 스페인 사람들의 주 거주지였던 도시 인트라무로스(Instramuros) 안에 위치해 있는 이 요새는 스페인의 군대 기지, 미국 육군 본부, 지하 감옥 등 다양한 시설로 이용되다가 1950년경 제2차 세계대전으로 훼손된 성문과 성벽을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입장료는 성인 75페소(약 1,800원)로 비싸지 않다.

(↑ 산티아고 요새(Fort Santiago)로 가는 길)
(↑ 매표소 입구와 외부 성곽)
(↑ 산티아고 요새(Fort Santiago) 입구)
(↑ 성곽 위에서)

   요새 안에는 작은 박물관이 있고 이 박물관 앞에 단정하고 성스러워 보이는 하얀 십자가 하나가 서 있다. 옆에 있는 지하 감옥(Dungeon)에서 죽어 간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처음 이 요새를 지었을 때는 탄약과 화약 보관소로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연중 습한 날씨와 근처의 파식 강(Pasig River)의 영향으로 습도가 높아 적당하지 않았다. 이후 이 공간은 감옥으로 개조되었고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필리핀 인사들을 가둬 두는 용도로 쓰였다. 이 감옥과 관련된 대표적인 인물로는 필리핀의 독립 영웅 호세 리잘(José Rizal)이 있다. 그는 스페인에 의해 처형되기 전까지 이 지하 감옥과 근처 막사에 수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독립 영웅 호세 리잘을 기리기 위한 동상과 기념관(Rizal Shrine)이 근처에 있다. 몇 년 전 내가 왔을 때는 이 기념관 안에서 그의  독립 투쟁 활동과 감옥 생활 등을 보여 주는 전시물을 볼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기념관이 닫혀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 리잘 동상과 기념관(좌) 지하 감옥 앞의 하얀 십자가(The White Cross))

  스페인 식민 시절이 끝난 이후 필리핀이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1941~1945년) 일본군은 이 지하 감옥을 일본에 저항하는 독립운동가를 고문하고 처형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300제곱미터(약 90평)의 공간에 너무 많은 포로를 수감하는 바람에 질식사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후 2차 대전이 끝나 일본군이 물러가고 미군이 도착했을 때, 감옥 안에서 약 600여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한다. 감옥 입구의 하얀 십자가는 이 억울하고 슬픈 영혼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 지하 감옥 입구(좌)와 출구)

  마닐라 대성당(Manila Cathedral)은 산티아고 요새에서 도보 6~7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1581년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인트라무로스 내 로마 광장에 있는 대주교좌 성당으로 처음 건축되었다. 원래는 대나무와 니파, 야자수로 지어진 목조 건물이었으나 전쟁과 지진, 화재 등으로 파괴되었고, 여러 차례 재건을 통해 로마네스크-비잔틴 양식의 설계를 유지하면서 1958년 현재의 석조 건물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라고 한다. 또 1981년에는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소 바실리카로 지정되었다. 마닐라 대성당은 섬세하고 정교하게 꾸며진 제단, 화려하고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창과 대성당의 역사를 새긴 대형 청동문 등을 눈여겨볼 만하다.

(↑ 마닐라 대성당(Manila Cathedral) 외부)
 (↑ 대성당 내부, 베드로상(중앙)과 성모상(우))

  마닐라 대성당을 나와 약 5분 거리에 성 어거스틴 성당 건너편에 위치한 박물관 카사 마닐라(Casa Manila)가 있다. 이곳은 1850년대 인트라무로스에 거주했던 필리핀 상류층의 생활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곳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스페인의 안뜰인 파티오 구조와 당시 사용했던 가구와 식기류, 장식품, 예술품 등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더운 날씨 탓인지 조금 지친 나는 차를 마시면서 좀 편히 쉬고 싶어져 친구와 헤어져 로빈슨몰(Robinsons Place Manila)로 먼저 갔다.

  몰 안에는 다양한 브랜드들이 있는데 1층 맥도날드 쪽 출입구로 들어서니 보라카이에서도 봤던 백다방이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역시 반가웠다. 몰은 규모가 큰 편이어서 나는 각 층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눈으로만 즐거운(?) 쇼핑을 했다. 조금 늦은 점심 무렵 친구가 도착했고 우리는 푸드코트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 로빈슨몰(Robinsons Place Manila) 내부)
(↑ 푸드코트에서 주문한 메뉴)

  점심 식사 후 우리는 각각 간단한 쇼핑(나는 반바지 두 개를 샀다.)을 한 후, 택시를 타고 크루즈 선이 있는 항구로 돌아왔다. 두 대의 크루즈 선이 동시 입항한 터라 배로 돌아오는 항구의 출입구는 이렇게 따로 구분해 놓았다.

(↑ 크루즈 선으로 돌아가는 길(좌), 배 위에서 바라본 마닐라 시내)

 

  쿠리마오(Currimao)는 마닐라가 있는 루손섬 북서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다. 구글 지도의 정보로는 마닐라에서 쿠리마오까지 460km, 차로 약 8시간 30분이 걸리는 곳이다. 일반 여행자들에게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길게 뻗은 한적한 해변이 있어 유유자적하게 고급 리조트에서 며칠 묵으면서 휴양하기에 좋은 곳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쿠리마오에서 50Km, 차로 약 1시간 떨어진 역사 도시 비간 시티(Vigan City)로 가야 한다. 그래서 사전에 선내 여행사에서 비간 왕복 버스(1인 $50)를 예약했다. 크루즈 선은 보라카이에서처럼 쿠리마오 항에 바로 접안하지 못하고 바다 위에 정박했기 때문에 12분 정도 보트로 이동해 항구에 내렸다. 항구에는 어김없이(?) 기분 좋은 환영 행사가 진행 중이었고, 각각의  투어별로 이미 여러 대의 버스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 멀리 떠 있는 크루즈 선과 환영 행사, 그리고 투어 버스)

  남일로코스(Ilocos Sur)의 주도인 비간(Vigan City)16세기 스페인 식민 시절에 건설된 계획 도시로 현재까지  잘 보존된 스페인 시대 건축물 유명하며 1999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10년 전 내가 필리핀 여행 중 이 도시에 왔을 때 이틀 정도 돌아봤는데, 역사적 유적지 중심으로만 보면 서너 시간 정도로 충분할 만큼 작은 곳이다.

https://audience65.tistory.com/101

 

2013년 2월 필리핀-비간(Vigan)

2013년 2월 17일(일) 비간(Vigan) 맑음 00:40 시손(Sison) PARTAS 버스터미널 도착 00:45 비간(Vigan) 행 버스 출발, 티켓 337p 04:20 비간 PARTAS 버스터미널 도착 06:00 파르타스 터미널→마이비간홈 호텔(My Vigan Home

audience65.tistory.com

  우리가 버스에서 내린 곳은 역사 유적지가 가까이 있는 성 바오로 성당(또는 비간 대성당) 앞이다. 바오로 대성당(The Metropolitan Cathedral of Saint Paul the Apostle(정식 명칭), San Pablo Cathedral)은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스페인 식민지 시대 대표적인 건축물로 정면(살세도 광장)과 측면(부르고스 광장)으로 두 개의 광장과 맞닿아 있어 도시의 중심이자 비간 여행의 출발점이 되는 곳이다. 지금은 한창 보수 공사 중이라 내부에 들어갈 수가 없다. 10년 전에 왔을 때도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들어가 볼 수 없었는데 인연이 없는 탓인지 이번에도 내부 구경을 할 수 없어 서운했다. 

(↑ 성 바오로 대성당(San Pablo Cathedral))

  성 바오로 성당에서 스페인 식민 시대 건축물들이 모여 있는 칼레 크리솔로고(Calle Crisologo)로 가려면 성당을 마주보고 오른쪽 측면에 있는 부르고스 광장(Plaza Burgos)을 지나야 한다. 광장 근처에는 익숙한 맥도날드와 졸리비가 나란히 보이는데 이를 뒤로하고 광장으로 들어서면 부르고스 신부의 동상이 있고 그 뒤로 야외 무대(?)가 있는 쉼터가 보인다. 또 오른쪽으로 '비간의 로사리오 성모(Nuestra Señora del Rosario de Vigan)'로 불린다는 검은색 성모상도 볼 수 있다. 이 광장의 이름 '부르고스'는 식민지 시절 독립을 위해 순교한 세 명의 신부 중 한 명인 '파드레 호세 부르고스(Padre Jose Burgos)' 신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근처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생가를 개조해 꾸민 박물관도 있다고 한다. 광장을 지나다 보니 10년 전 필리핀식 소시지인 롱가니자를 먹기 위해 갔던 '론리플래닛' 추천 식당 '카페 레오나(Cafe Leona)'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어 반가웠다.

(↑ 부르고스 광장(Plaza Burgos))
(↑ 부르고스 광장 주변 거리, 오른쪽은 '카페 레오나')

  비간 역사 마을(Historic City of Vigan)이라고 하는 스페인 식민 시대 건축물들이 몰려 있는 곳이 칼레 크리솔로고(Calle Crisologo)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은 스페인식뿐만 아니라 필리핀의 다른 지역과 중국 등의 영향을 받은 건축 양식으로 독특하고 고풍스러운 모습을 자아낸다. 이 거리는 흰 벽의 건물, 아치형 가로, 조약돌 바닥 등이 유명한데, 그 돌바닥 위를 식민 시절의 마차 '칼레사(Kalesa)'가 지나며 규칙적으로 반복하여 '따각따각' 내는 말발굽 소리도 인상적이다. 뿐만 아니라 조명이 들어오는 밤 풍경은 수백 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낭만적이어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 또는 '세계에서 가장 로맨틱한 거리'로 불리기도 한다고!

(↑ 칼레 크리솔로고(Calle  Crisologo))

  나는 이 칼레 크리솔로고(Calle Crisologo) 입구에서 친구와 헤어져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로 갔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블로그 글도 정리하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 1시쯤 부르고스 광장으로 돌아와 친구를 다시 만났다.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 식당대신 지난 번 내가 와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는 광장 앞 야외 푸드코트(?) 쪽으로 갔다. 이곳은 크지 않지만 벽면이 없는 회랑식 건물로 몇 개의 상점과 식당이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각각 세 가지 반찬과 밥, 음료를 사서 광장 앞 야외 식탁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참고로 아래 사진의 내가 먹은 메뉴는 모두 115페소 우리 돈 약 2,800원 정도로 매우 저렴하다.

(↑ 광장 앞 야외 식당에서의 점심 식사)

  예정된 투어 버스 탑승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점심 식사 후에 우리는 대성당 앞에 있는 중앙에 분수가 있어 분수 광장이라고도 하는 살세도 광장(Plaza Salcedo) 쪽으로 산책을 했다. 이 광장은 스페인 식민 시절 일로코스(Ilocos) 주 전체 부총독 '후안 데 살세도(Juan de Salcedo)'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비간의 심장'이라는 별칭이 있다고도 한다. 살세도 광장 중앙으로는 큰 분수가 있고 주변에는 시청사, 남일로코스 주청사 등이 자리잡고 있다. 또 광장에는 내가 잘 알 수 없는 여러 개의 동상과 조형물이 있었는데 그 중 필리핀 독립 영웅 리잘 동상도 볼 수 있다.

(↑ 살세도 광장( Plaza Salcedo))

  리잘 동상이 마주하고 있는 쪽은 퀘존 애비뉴(Quezon Ave)와 맞대 있고 길 건너 맞은편으로는 남일로코스 주청사가 있다. 우리는 이 길을 따라 퀴리노 다리(Quirino Bridge)로 걸어갔다. 다리 아래 흐르는 '고반테스 강(Govantes River)'은 역사적으로는 과거에 비간이 교역으로 활발했을 때 물류 이동에 중심 역할을 했던 곳이다. 우리는 다리 위에서 주변 풍경을 잠시 감상하면서 다리를 반쯤 걷다가 투어 버스를 타기 위해 성 바오로 대성당 앞으로 갔다. 예정된 시간에 맞춰 투어 버스가 도착했고 우리는 다시 쿠리마오로 돌아왔다.

(↑ 퀴리노 다리(Quirino Bridge)와 고반테스 강(Govantes River))

  쿠리마오 항구에는 오후 3시 10분쯤 도착했는데, 크루즈 선으로 돌아가는 보트를 타기 위해 긴 줄을 서야 했다. 크루즈선과 선착장을 오가는 보트는 5~6대가 보였으나 접안은 한 대씩만 할 수 있어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할 수 없이 그늘도 없는 한낮의 뙤약볕 아래에서 약 1시간 20분 정도를 기다린 후에야 겨우 보트를 탈 수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짧지 않았으나 찬 물수건과 얼음물을 준비해 일일이 나눠 주는 직원들의 서비스를 받으니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때문인지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크루즈 선이 멀리 보이는 항구)
(↑ 긴 줄을 서며 보트를 기다리는 사람들) 
(↑ 모든 승객들이 크루즈 선에 도착하면 보트는 다시 크루즈 선으로 올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