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동남아 크루즈의 기항지는 베트남 푸미(Phú Mỹ, 호치민(Ho Chi Minh)), 브루나이 반다르 세리 베가완(Bandar Seri Begawan),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Kota Kinabalu), 필리핀 푸에르토 프린세사(Puerto Princesa), 보라카이(Boracay), 마닐라(Manila), 쿠리마오(Currimao, 비간(Vigan)), 그리고 대만의 가오슝(高雄市, Kaohsiung) 등 모두 여덟 개 도시이다. 하지만 우리는 처음 계획대로 최종 목적지인 타이베이가 아니라 가오슝에서 하선할 것이므로 가오슝은 우리 여행의 최종 목적지가 된다.
사실 이번 크루즈에서 우리는 브루나이를 제외한 다른 도시들은 굳이 내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도시들은 우리가 이미 개별 여행이든 패키지 여행이든 여러 번 다녀왔던 곳이라 큰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브루나이는 한번도 가 본 적이 없어 궁금했기 때문에 배에서 내려 도시를 둘러보고 싶었다. 그래서 첫 기항지인 푸미(Phú Mỹ)에 입항했을 때는 내리지 않고 하루종일 배 안에만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 브루나이에서 내려 보고 돌아온 후로 우리는 나머지 기항지 모두 배에서 내기로 했다. 더불어 첫 기항지 푸미에서도 내려 이 작은 도시를 잠시나마 둘러보고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돌아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이 날 대부분의 승객들은 푸미에서 내려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호치민으로 갔다.
배에서 내리는 과정은 복잡하지 않다. 일단 크루즈선이 항구에 도착하면 모든 승객 및 승무원들의 입국 절차를 진행하고 입국 심사가 끝나면 하선이 시작됐음을 방송으로 알려 준다. 대체로 투어팀이 먼저 나가고 이후 자유 여행을 하려는 사람들이 차례로 나간다. 배에서 내릴 때는 내리기 직전 출입구(보통 4, 6층)에서 객실의 키카드를 기계에 읽히는데 화면에 승선시에 즉석에서 찍었던 사진과 함께 개인 정보가 뜬다. 이 절차는 돌아올 때도 한 번 더 이루어진다.
브루나이(Brunei Darussalam)는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보르네오 섬 북단에 자리잡고 있다. 수도는 반다르세리베가완(Bandar Seri Begawan), 국교는 이슬람교, 동남아시아 유일의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 국가로 모든 실권을 술탄(왕)이 갖고 있다. 국토의 전체 면적은 제주도의 약 3배 정도 되는 5,765 평방 킬로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중 하나이며, 풍부한 석유 매장량을 갖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15~16세기에는 세력이 꽤 컸다고 하나 1890년 영국에 의해 나라가 두 개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1984년 29대 술탄인 현 국왕에 의해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1929년 석유가 발견된 후로 브루나이 국민은 세금을 내지 않고 모두 연금 혜택을 받게 되었으며, 단 몇 달러로 교육, 의료 등의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또 이슬람 전통이 강한 나라로 1991년 술 판매가 금지되었고, 금지 복장 코드표가 도입되기도 했다.
우리가 탄 크루즈 선박이 도착한 곳은 무아라 항(Muara Port)으로 수도인 반다르세리베가완까지는 차로 약 45~50 분 떨어진 곳이다. 우리가 항구에 내려 수도까지 갈 택시(버스는 오지 않는 곳이다.)가 있을지도 알 수 없고 무엇보다 우리한테는 당장 쓸 수 있는 브루나이 화폐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하루 전날 선내 여행사에서 크루즈 정박 항과 반다르세리베가완 도심을 잇는 왕복 버스 티켓을 샀다.(모든 왕복 버스 티켓은 1인당 $50로 다소 비싼 편이었다.)
브루나이는 워낙 작은 나라이기도 하고 역사가 화려한 것도 아니어서 여행지로서는 큰 매력이 없다. 다만 강력한 이슬람 국가인 만큼 몇 개의 이슬람 사원(모스크), 박물관, 술탄의 궁전 등을 볼 수 있고, 정글이나 해변에서 여러 가지 체험을 하거나 휴식을 즐길 수도 있다.
항구에서 출발한 버스는 약 45분 후에 수도인 반다르 세리 베가완의 중심지인 야야산 술탄 쇼핑몰(Yayasan Sultan Haji Hassanal Bolkiah) 앞에 도착했다. 버스에 함께 탔던 가이드는 지도 한 장을 나눠 주며 우리가 내리는 위치와 주변에 둘러봐야 할 몇 가지 건물들을 알려 주었다. 우리는 지도 상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BIDB 프래임(BIBD frame Brunei Darussalam)으로 갔다. 이곳은 커다란 액자의 프래임 모양의 구조물로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모스크(Masjid Omar 'Ali Saifuddien)를 이 프래임 안에 담아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모스크(Masjid Omar 'Ali Saifuddien)는 브루나이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데, 제28대 브루나이 술탄의 이름을 딴 모스크로 반다르세리베가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모스크는 브루나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모스크 중 하나로 황금색 돔이 가장 눈에 띈다. 건물 주변으로 인공 호수가 둘러싸고 있고 건물 뒤편 호수 위에는 전통 양식의 배가 한 척이 떠 있다. 건물의 설계는 이탈리아 건축가에 의해 이루어졌고 금, 대리석, 스테인드글라스 등 다양한 자재를 사용하여 화려하게 지었다. 내부 입장은 기도 시간과 금요일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만 가능하며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기도 시간이어서 아쉽게도 내부로 들어가지 못했다.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모스크를 지나면 지도의 삼각형 상단 모서리에 이르면 특이한 모양의 건물을 만나게 된다. 이 건물은 로얄 리갈리아 센터(Royal Regalia Museum, 왕립 박물관)로 브루나이 왕조의 600년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왕실 박물관이다.
건물 지붕이 나선형의 아이스크림 모양을 하고 있는데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모스크와 함께 제29대 국왕 아스르 하사날의 즉위 25주년을 기념하여 지어졌다. 국왕의 대관식 때 사용한 황금마차 실물을 모조품 함께 전시하고 있으며, 그 외 왕족들의 각종 장식품, 국가별 훈장, 국가 문서 등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무궁화 훈장과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명이 담긴 문서 및 그가 선물한 도자기 등도 전시 중이라고 한다. 우리는 날씨도 덥고 걷기도 힘들어서 굳어 들어가지 않고 지나왔다.
야야산 술탄 쇼핑몰로 돌아오기 전 우리는 넓은 운동장(?)을 지나게 되었다. 이곳은 타만 하지 무다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공원(Taman Haji Sir Muda Omar 'Ali Saifuddien)인데 (독립) 광장, 경기장, 공원 등으로 여겨진다. 1984년 1월 1일 자정에 브루나이 독립 선언문이 발표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단다. 현재는 브루나이 국경일(2월), 술탄 탄신일 등 연례 국가 행사, 전국적인 스포츠 행사를 하는 곳이다. 안에는 도시의 이름이 반다르 세리 베가완(Bandar Seri Begawan)으로 변경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정원과 기념물이 있다고 한다.
야야산 광장을 중심으로 야야산 쇼핑몰(Yayasan Sultan Haji Hassanal Bolkiah)과 식당, 카페들이 어우러져 있다. 수도 반다르세리베가의 시내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사람들의 이동이 잦은 번화가이다. 하지만 사실 번화가라고는 하나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도심에 비해서는 오히려 한산한 편이고 쇼핑몰 내부에도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누군가 무질서하고 복잡한 동남아시아의 여러 도시들에 비해 브루나이는 거리가 깨끗하고 오토바이가 없는 것이 차이라고 말했다는데 내가 본 브루나이의 거리도 역시 그랬다. 도로는 대체로 한산하고 동남아 여느 도시에서 늘 보았던 그 많던 오토바이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브루나이 정부가 가정당 평균 4대의 차량을 지원해 주고 있어 차량 보급률이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라 하니 도로에서 오토바이를 볼 일이 거의 없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코타키나발루(Kota Kinabalu)는 '키나발루 산의 요새'라는 뜻의 도시이다. 보르네오 섬 북서 해안에 위치한 이 도시는 키나발루 국립 공원으로 향하는 관문이라고 한다. 나는 그저 해변에서 여유롭게 물놀이를 즐기거나 섬 투어를 하는 휴양 도시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높은 해발 4,095 미터의 키나발루산은 등산 애호가들에게는 도전적인 트레킹을 하면서 주변의 환상적인 풍경을 감상하기에 좋은 곳이란다.
도시 자체가 크지 않아 시내에서의 관광과 쇼핑은 하루면 충분하지만 적어도 3박 4일 정도는 부지런히 다녀야 코타키나발루를 제대로 둘러볼 수 있다. 그리고 여행 일정 중 일요일이 끼었다면 잘란 가야(Jaland Gaya)에서 열리는 가야 일요 시장(Sunday Market)에도 가 보면 좋을 것 같다.
지도를 보니 크루즈 선이 정박한 곳은 수리아 사바몰(Suria Sabah shopping Mall)이 있는 도심에서 도보로 약 25분 거리에 있었다. 배에서 내려 보니 입항을 환영하는 공연이 한창이었는데 이런 공연은 대부분의 기항지에서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일단 걸어서 수리아 사바몰까지 가 보기로 했다.
수리아 사바몰은 별 특징은 없고 여러 나라의 레스토랑, 푸드코트, 백화점, 각국의 브랜드가 있는 현대적인 쇼핑몰이다. 몰까지 가는 길에는 여느 동남아시아의 도시와 비슷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날이 더워 몰 안으로 들어가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잠시 쉬었다.
땀을 식히고 몰에서 나와 우리가 걸어 간 곳은 청새치 동상(Marlin Statue)이 있는 곳이다. 몇 년 전 내가 왔을 때 가 본 곳 중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곳이었다. 근처에는 푸드 코트도 있고 열대 과일이나 채소, 생선을 파는 중앙 시장(Kota Kinabalu Central Market)이 있었으나 굳이 들르지 않고, 우리는 길을 건너 맞은 편 길로 들어섰다.
우리는 청새치 동상을 기점으로 맞은편 길로 건너가 여행 안내소에도 잠시 들르고 거리 여기저기를 그냥 둘러 보다가 다시 우리 배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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