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시아/2024년 4월 MSC 크루즈

가고시마(鹿児島, Kagoshima) 단군 사당, 심수관 도요지

  이번 여행은 크루즈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지만, 기항지 중 한 곳이었던 가고시마(鹿児島)에서의 일정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가고시마의 위치와 주요 관광지는 공식 관광 정보 사이트를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가고시마에서 가 볼 만한 가장 대표적인 곳이 활화산인 '사쿠라지마(桜島, Sakurajima)'이다. 마침 크루즈선이 정박한 항구와 멀지 않은 곳이어서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이곳으로 향했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도 이 화산섬을 가려고 했다. 그러던 중 함께 가신 우리 선생님께서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가고시마로 끌려간 피로조선인(被虜朝鮮人) 도공 심당길의 후손 심수관 가()의 도요(陶窯址) 있으니 가 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크루즈 항에서 가는 방법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전철과 기차, 택시를 이용하면 조금 저렴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실제로 일본 전문 가이드를 오래 하신 분이 보낸 시간과 경로, 비용까지 상세하게 공을 들여 만든 파일도 받았다. 그분이 보내 주신 대로 가는 방법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대중 교통을 이용해 심수관 도요지를 가는 방법>

1. Marin Port Kagoshima(taxi 약 10 분, 약¥1200) ※택시승강장은 승선객이 많으면 택시가 혼잡. 많이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KAKAO TAXI 앱으로 일본 GO TAXI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항에서 JR 鹿児島中央駅행 셔틀버스도 있습니다. 그러나 30~60 분에 1 대. 역까지 약 30 분

2. JR 宇宿駅 Usuki 역(전철 약 30~40 분, Ijuim 역까지 표 구입, ¥480)
指宿枕崎線 鹿児島中央行(Ibusukimakurazakisen Kagoshima Chuo 행)

3. JR 鹿児島中央駅(Kagoshima Chuo 역) 환승(鹿児島本線 川内行(Kagoshima Honsen Kawauchi) 행)

4. JR 伊集院駅 Ijuin 역(taxi 약 12 분, 약¥1500~1700) ※역에 택시 승강장이 있습니다.

5.Gaol 沈壽官窯(Chinjukangama), 鹿児島県日置市東市来町美山 1715, Tel 099-274-2358

 
  그러나 우리는 크루즈 승선 시간을 맞추기 위해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야 했는데, 열차를 놓치면 난감한 지경에 이를 수도 있고, 무엇보다 지팡이를 짚고 다니셔야 하는 선생님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면 무리일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비용이 들더라도 택시를 몇 시간 빌리는 방법을 찾아 봤다. 그러던 중 일본의 한 사이트에서 가고시마 택시 투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사이트에 소개된 정해진 루트를 반드시 가야 하는 것은 아니어서 메일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날짜, 시간, 루트를 알려 주고 택시를 예약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크루즈 항구에서 심수관 도요지와 단군 사당 왕복, 기본 3시간, 요금¥21,000, 고속도로 통행료 및 주차료(약 1,900 예상) 별도, 시간 추가 시 30분 당 ¥2,500으로 예약을 완료했다.
 
  그런데 크루즈의 첫 기항지인 가고시마에서의 일정은 순조롭게 시작되지 않았다. 아침에 선실에서 나와 하선하고 이민국(immigration office)을 통과하는 데까지 무려 세 시간 정도가 소요됐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우선 선내에서 일본 입국 관련 업무 처리에 대한 시스템이나 절차가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크루즈 선이 도착하면 첫 기항지에서 하선을 하든 안 하든 모든 승객이 입국 신고서와 여권을 갖고 이민국에서 입국 심사를 받고 도장을 찍어야 한다. 그렇다면 시간 차를 두고 기항지에 내려 투어에 참여하거나 개별 여행을 할 승객을 먼저 하선시키고 그 인원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후 배에 남을 승객들에게 입국 수속을 밟으라고 미리 안내했어야 한다.(실제로 NCL 크루즈에서는 매번 사전에 투어 팀과 투어에 참여하지 않는 일반 하선 승객들을 극장에 모아 놓고 각각 시간대별로 차례로 하선시켰다.) 그런데 4천 명이나 되는 승객들이 한꺼번에 모두 쏟아져 나오도록 방치함으로써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 와중에 배의 출구가 여러 개여서 늦게 나왔지만 우연히 앞 출구에 있던 사람들이 뒤쪽 출구에서 나와 오랜 시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앞에 끼어드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그로 인해 긴 기다림에 지쳐 있던 승객들이 항의를 하고, 일부 승객들은 자기들끼리 자리다툼을 하며 언성을 높이는 일도 있었다. 
  입국 수속이 늦어진 두 번째 이유는 일본의 아날로그적인 시스템 때문이었다. 이전에 경험했던 크루즈의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크루즈 선이 입항하면 이민국과 연계된 시스템으로 모든 승객의 입국 심사가 하선 직전 본인 확인만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승선 시에 미리 맡겨둔 여권에는 배가 닿았던 모든 나라의 출입국 도장이 다 찍혀 있었다. 그런데 수많은 크루즈 선박들이 들고나는 출발항이자 도착항이 있는 일본에 이런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 의아했다. 어쨌든 크루즈의 모든 승객들은 전날 미리 배부된 종이로 된 입국 카드와 여권을 갖고 배에서 내려 이민국(immigration office)에서 입국 심사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나는 동행하신 선생님 두 분과 함께 사전에 Visit Japan Web 사이트에서 전자 도착 카드를 작성하고 세관 신고까지 끝낸 후 QR 코드를 받았다. 그래서 오랜 시간 대기한 끝에 입국 심사대에서 미리 준비한 Visit Japan QR 코드를 제시했더니 직원은 이 사이트 존재 자체를 아예 모르는 눈치였다. 내가 작성 내용을 보여 주며 설명을 했더니 옆 자리 직원에게 물어 보고는 겨우 이해하는 듯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종이 입국 카드를 다시 써야 한다는 것. 이곳에는 QR 코드를 읽을 수 있는 장비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답답하고 할 말도 많았지만 다른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종이 입국 카드와 세관 신고서를 써서 제출하고 겨우 입국 심사대를 빠져 나왔다.

(&amp;uarr; 심수관 도요지 가는 길(좌)과, 가고시마에 입항한 벨리시마 호)

 

(↑ 입국 심사를 위해 길게 늘어선 줄)
(&amp;uarr; 입국 심사를 위해 길게 늘어선 줄)

  이렇게 해서 결국 오전 10시에 만나기로 한 택시 기사는 12시 20분쯤 만날 수 있었다. 약속 시간이 두 시간 이상 지체되었음에도 기다려 준 기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이날 느려터진 입국 심사 과정을 제외하면 우리는 참 소중하고 의미 있는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먼저 심수관 도예관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단군 사당(단군 신사(다마야마 신사), 옥산신사, 옥산신궁(玉山神宮), 옥산궁)에 도착했다. 고속도로를 지나 지름길로 왔기 때문에 크루즈 항에서 단군 사당까지는 약 40분 정도가 소요됐다.
  1598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전라도에 침입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가 남원성을 공략해 도공들을 일본으로 강제로 끌고 가면서 가고시마에는 조선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때 도공 박평의(朴平意)1대 심수관인 심당길(沈當吉)도 잡혀가 이 곳에 정착하게 되는데 순수 조선인만 1000명에 이르는 마을을 이뤘다고 한다. 이들은 현재는 미야마(美山)로 이름이 바뀐 이곳 조선인 거주 마을 뒤에 단군을 모신 사당을 짓고, 조선인끼리만 혼인하고 조선말을 하며 조선인의 정체성을 유지했다고 한다. 가고시마는 특히 사무라이 정신이 강한 곳이었음에도 사쓰마번(가고시마)의 번주(藩主)는 조선의 도예 기술을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기술을 고스란히 전수받기 위해 단군 숭배 등 가능한 조선인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또는 묵인?)했던 것으로 본다고 한다.(출처 : 헬로디디 https://www.hellodd.com/news/articleView.html?idxno=61871 참고)
  단군사당(옥산신궁(玉山神宮))은 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 일본 '가고시마현(鹿兒島縣) 히오키시(日置市) 히가시이치키초 나가사토(東市来町長里)에 있는 조선 후기 조선인 도공들이 건립한 단군 관련 신사(神社) 또는 사당'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강제로 끌려온 도공 박평의(朴平意), 심당길(沈當吉) 등 다수의 조선인들이 항상 고국을 잊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날 고국의 하늘에서 신암(神岩)이 날아온 것을 계기로 1708년 '옥산궁(玉山)'을 창건했다고 한다. 이들은 고국인 조선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단군 신을 섬기고, 매년 제사를 지낼 때는 우리말로 된 제문(祭文)을 읽고 축가(祝歌)를 불렀다고 한다. 이후 여러 번의 변천을 거쳐 도기신(陶器神), 항해와 어업의 신 등을 모시는 지금의 신사로 남게 되었다. 초대 도공 심당길(沈當吉)의 14세 손 심수관(沈壽官, 1926년 ~ 2019년)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동네가 떠들썩하게 단군 축제가 벌어졌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단군 축제의 전통이 끊긴 상태로 더 이상 행해지지 않는단다. 
  한편, 이곳 미야마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후에 규슈(九州)로 이주한 일부 조선인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규슈 섬 남단의 가시야시 가사노바라초(鹿屋市 笠之原町)에 동일한 단군 사당(옥산궁(玉山宮))을 세웠다고 한다.
  우리는 구글 지도가 가리키는 대로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좁은 길을 따라 낮은 키의 녹차밭이 펼쳐진 한쪽 끝에 얕은 오르막이 보이는 입구에서 차를 세웠다. 때마침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운전기사님이 차 트렁크에서 꺼내 주신 우산을 쓰고 사당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사당이 있는 곳까지는 3~4분 정도 걸어야 했는데 길 양쪽에는 오랜 세월 이곳에 살았던 조선인들의 삶을 지켜봤을 늙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서 있었다.
  드디어 낡은 목조 건물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가슴 밑에서 뭔지 알 수 없는 울컥함이 올라왔다. 우리 선생님은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 스탕달 증후군)'을 말씀하셨지만, 이 느낌은 아름다운 작품에 대한 깊은 감흥이라기보다는 슬프고 안쓰럽고 존경스러운 우리 민족의 삶에 대한 경이로움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또 어쩌면 창건 이래 증개축을 거치고 여러 부침을 겪고도 316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며 조선의 혼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며 지금까지 견뎌 준 것에 대한 깊은 고마움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amp;uarr; 단군 사당 입구의 도리이(鳥居)(좌)와 사당으로 가는 길)

  사당 건물은 낡고 오래된 흔적이 역력했다. 마치 오랜 삶의 풍파를 겪은 후 이젠 기력조차 쇠해 병색이 완연한 노인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깨끗하고 단정한 옷차림에 곱게 빗은 머리, 깊은 주름에 맑은 눈의 이 노인은 너무 늦게 찾아온 나에게 나 지막이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꾸지람 대신 '이제라도 와 줘서 고맙다, 너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건물을 한 바퀴 돌아봤는데 누군가 관리하는 이가 있는지 뒷편에는 청소도구도 가지런히 놓여 있고 청소한 흔적도 보였다. 먼저 이곳을 와 본 어떤 이는 거의 폐허로 남겨져 있다고 했는데, 건물은 목조임에도 내 예상보다 잘 보존돼 있었고 주변도 잘 정돈돼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사당을 다 둘러보고 본전(本殿)을 떠나기 전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맑은 물이 흐르는  '데미즈샤(手水社, 일본의 신사나 사찰에 있는 손이나 입을 씻는 곳)'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였다. 우리가 다시 입구로 돌아오자 기사님은 우리 세 사람을 신사 입구임을 알려 주는 '도리이(鳥居)' 앞에 나란히 서라고 하더니 기념 사진을 찍어 주셨다. 우리는 다시 녹차밭을 돌아 나와 심수간 도요지(陶窯址, 가마터)로 향했다.

(&amp;uarr; 단군 사당의 정면과 측면)
(&amp;uarr; 단군 사당의 정면 입구에 있는 데미즈샤(手水社))
(&amp;uarr; 사당을 내려가는 길, 도리이(鳥居) 앞에서 찍은 기념 사진(우))
(&amp;uarr; 단군 사당 입구 앞에 펼쳐진 녹차밭)

  
  심수관 도요지(沈壽官窯, 沈家伝世品収蔵庫)는 가고시마 공식 관광 사이트에도 소개돼 있는 관광 명소 중 한 곳이다.(구글 지도 위치) 심수관(沈壽官)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일본 사쓰마도기(薩摩燒)를 개창한 심수관가의 15대를 총칭하는 용어이다.
  그런데 원래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가고시마로 끌려가 도공이 된 1대 심수관의 이름은 심당길(沈當吉)이다. 그는 청송 심씨로 남원 근교에서 피랍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반가의 자손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가 1598년 12월, 시마즈요시히로(島津 義弘)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갔을 당시에는 도공이 아니었다. 심당길은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해 당시 함께 끌려왔던 도공 박평의(朴平意)에게 도예 기술을 배운다. 이후 한동안(약 18년 간) 도자기의 원료인 좋은 흙을 찾지 못하다가 박평의와 함께 백토(白土)를 발굴하여 조선의 전통 가마 형식인 '오름가마(등요(登窯), 낮은 경사면에 터널형 구조로 축조한 가마)'를 만들고 백자 제작에 성공하는데, 이것이 오늘날 일본의 사쓰마도기(satsuma[薩摩]陶器)가 된다. 사쓰마도기는 이삼평(李參平)의 아리타도기(有田燒)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도기로 꼽힌다고 한다.  사쓰마도기는 1867년 심당길의 12대 후손 심수관이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하며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후 그는 1873년 오스트리아 빈 만국박람회에도 대화병 한쌍을 출품했는데, 이때부터 사쓰마도기의 수출이 시작되었고 ‘사쓰마웨어(Satsuma Ware)’라는 이름은 일본 도자기의 대명사가 될 만큼 유명해졌다. 2002년에는 일본의 전통 공예품으로 지정되었다.
  이 ‘사쓰마웨어(Satsuma Ware)’는 종류가 다양하고 특징도 설명하기 쉽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단순하게는 사용하는 유약의 종류에 따라 시로몬(Shiromon, 또는  Shiro Satsuma)과 구로몬(Kuromon 또는 Kuro Satsuma)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시로몬은 옅은 황토에 무색의 유약을 바른 도기이며, 구로몬은 검은색, 갈색 등의 유약을 바른 도기이다. 시로몬은 백색 혹은 옅은 황색 바탕에 화려한 디자인의 무늬를 넣은 것으로 주로 귀족들이 사용한 사치품이었으며 예술로 인정되는 작품이 었다. 그런가 하면 구로몬은 토기와 같은 주로 짙은 갈색의 투박한 형태로 일상 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대중들의 그릇들이 많다.
  참고로 15대까지 이어온 심당길(1대 심수관)의 후손들은 약 400년의 기간 동안 모두 조선인 후예들과 혼인했고, 현재 16대 심수관 씨가 도예 기술을 전수 받고 있는데, 그는 일본인과 혼인했다고 한다.
 심수관 도요지는 단군 사당과는 도보 약 10여 분, 차로 3~5분 거리에 있다. 이 마을은 심수관요뿐만 아니라 지금도 도자기를 만드는 여러 개의 가마가 있고, 도예 체험관, 박물관 등이 있어 도자기 마을로 남아 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대문 입구에 걸린 문패에 '一五 沈壽官(15대 심수관)'이라는 선명한 글자를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amp;uarr; 심수관 도예지의 대문(출입구))

  우리는 먼저 박물관을 둘러보기로 했는데 입구에는 지키는 사람은 없었지만 옆 건물에 있는 기념품점에서 표를 사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기념품점에서 1인당 500엔의 입장권을 사 자그마한 박물관에 들어갔다. 박물관의 규모는 아담했지만 층별로 아기자기 잘 꾸며놓았다. 1층 외부 입구 한쪽으로는 옹기 같은 항아아리들이 있고 내부에는 큰 크기의 도자기들이 전시돼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조선시대 남자 복장을 한 도자기 인형이 눈에 들어왔고 각종 문서와 책자들이 가지런히 있었다. 좁은 계단으로 한층을 더 올라가니 섬세하고 화려한 도자기들과 함께 투각의 항아리가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도자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눈이지만 나는 이 도자기 앞에서 잠시 동안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amp;uarr; 박물관 입구와 내부 전시실)
(&amp;uarr; 박물관의 여러 전시물)

 
  도요지 내부에는 도자기 박물관 외에도 기념품점, 가마 등이 있고 주변에는 정원이 깨끗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또 가마를 따라 낮은 경사로를 올라가니 길 건너편에 2층 집이 보였는데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안내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심수관 씨의 개인 가정집이 아닐까 생각했다.

(&amp;uarr; 정갈하게 잘 가꿔진 정원)
(&amp;uarr; 기념품점)
(&amp;uarr; 여전히 전통 방식을 이어오고 있는 경사진 형태의 오름 가마)
(&amp;uarr; 가마 위 뒤편에 있는 심수관가의 개인 집으로 추정되는(?) 건물)

 
  참고로 이 심수관 일가의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일본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1968년 심수관가의 이야기를 소재로 쓴 <고향을 어이 잊으리까>를 출간한 이후부터였다고 한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 바로 한국에 가장 잘 알려진 '14대' 심수관이었는데, 그는 1989년 우리 정부로부터 주가고시마 명예 총영사로 임명되었고, 1999년에는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2004년에는 한일 정상회담을 마친 노무현 대통령이 심수관요를 방문했는데, 이때 그는 직접 사쓰마도기의 유래와 특징을 설명하기도 했다. 지금도 박물관 맞은편 건물 입구에는 여전히 '주가고시마 대한민국 명예 총영사관'이라는 선명한 글자가 새겨진 현판이 걸려있다.

(&amp;uarr; 주가고시마 대한민국 명예 총영사관 현판이 걸린 건물)

 
  이전에 이곳을 다녀간 어떤 이들은 차를 마시기도 하고 간단한 식사도 했다고도 하고, 심수관 씨를 만나 기념 사진을 찍기도 했다는 후기도 썼다. 하지만 우리는 예정보다 너무 늦게 출발한 탓에 차 한 잔 마실 시간 여유도 없었고, 안타깝게도 심수관 씨를 만날 수도 없어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다시 차에 올랐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심당길(沈當吉)에게 도예 기술을 전수하고 '사쓰마도기'를 연 창시자였던 도공 박평의(朴平意)의 후손들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7년) 이후 더 이상 도공의 길을 걷지 않는다. 시대가 변하면서 사무라이의 보호가 무너지고 조선인 핍박이 시작되면서 1800년대 말 도자기를 산업화하여 크게 성공한 박수승(朴壽勝)은 그의 아들 박무덕(朴茂德)이 5살 되던 해 300년 가까이 지켜온 박씨 성 대신 사쓰마 번사였던 '도고 야하치로(東鄕彌八郞)'의 호적을 구입하여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꾼다. 이후 박무덕은 '도고 시게노리(東郷 茂徳, 1882.12.10 ~ 1950.07.23)'가 된다. 수재였던 그는 일본 최고 대학인 동경제대에 입학하고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이 된다. 태평양 전쟁 당시 외무 대신이었던 그는 '천황제 사수'를 주장했고 이로 인해 A급 전범 25명 중 유일한 조선계 일본인으로 이름을 올린다.
  힘이 없던 조선의 백성들은 침략자 일본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갔고 그 후손들은 도자기 굽는 일로 삶을 이어가야 했으며, 고국을 잊지 못해 400여 년 간이나 조선의 말과 문화를 지키며 살았다. 누구는 지금까지 도자기의 명가를 이어갔고, 누구는 일본 속에 녹아들어 진짜 일본인이 되기를 선택했다. 누가 옳고 그른지, 누가 가치 있는 선택을 한 것인지는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그리워한 조국은 그 긴 세월 지난한 삶을 살았을 이들 피로조선인(被虜朝鮮人)들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있었으며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생각하게 된다. 
 
  돌아오는 길은 가고시마 시내 중심가를 관통해 지나왔다. 기사 아저씨가 짧은 시내 투어를 해 주신 셈인데, 노면 전차며, 크고 작은 건물에 대한 설명도 간단하게 해 줬다. 마지막엔 바다 건너 '사쿠라지마(桜島, Sakurajima)'가 보이는 길로 접어들어 잘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항구로 돌아와 택시에서 내려 배에 오르기 전 기념 사진을 찍고 정산을 했다. 예정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추가 요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조금 걱정했는데, 기사님은 고속도로 통행료를 포함, 추가 대기 시간을 적당히(?) 계산해 모두 ¥30,000을 요구했고 우리는 흔쾌히 지불했다.

(&amp;uarr; 노면 전차가 있는 가고시마 시내)
(&amp;uarr; 항구로 돌아와 찍은 기념 사진과 우리를 안내한 기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