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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2021년 12월 그리스

그리스 아테네 5일 리카베투스 산,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소크라테스 감옥, 케라메이코스

12월 24일(금) 아테네(Athens) 5일(17,500보 / 10.5km)

 

  • 숙소 → 리카베투스 산(Lycavettus Hill) →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 소크라테스 감옥(The Prison of Socrates) → 헤파이스토스 신전(Temple of Hephaestus) → 케라메이코스(Kerameikos) → 숙소

 

오늘은 오전에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산 리카베투스에 가기로 했다. 비록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우리는 벌써 여러 날 행군하듯이 많이 걸었던 터라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걸어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산 아래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가서 지하철 역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정상 근처까지 가기로 했다. 

리카베투스 산(리카비토스 Λυκαβηττός, Lycavettus Hill)은 360도 파노라마로 시내 곳곳을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해발 277m의 언덕(산)이다. 택시 외에도 이 산을 오르는 방법은 텔레페릭(Teleferik)이라는 등반 열차(일종의 케이블카)를 타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전에 이것에 대한 정보도 없었을 뿐 아니라 1인당 편도 3.5유로의 이용 요금을 감안하면 세 명이 택시(5유로)를 타고 오르는 방법이 경제적으로도 유리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택시는 성당이 있는 산 정상까지는 길이 없어 갈 수 없고 전망대처럼 넓은 공터가 있는 곳까지만 닿을 수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성당을 향해 올라갔다. 아주 가까운 거리라고 생각했지만 오르는 길은 그리 만만하지 않아서 중간에 두어 번 쉬면서 올라온 길을 뒤돌아보고 시내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리카베투스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

힘겹게 오른 산 정상에서 바라본 아테네 시내는 아름다웠다. 수십 층에 달하는 고층 건물이 없는 아테네는 우리가 며칠간 다녀왔던 유적지들의 위치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테네 도착 이틀째 되는 날 맞은편에서 이 곳을 바라봤던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였다. 이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일출, 일몰, 야경 모두 아름답지만 아테네에 머무는 시간에 여유가 있는 여행자라면 그 중 하나는 꼭 보고 갈 수 있었으면 한다.

'늑대들의 언덕'이라는 뜻인 리카베투스라는 이름은 원래 이곳이 늑대들의 은신처였던 까닭에 붙여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이곳은 또 아테나 여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신화에 따르면 아테나 여신은 헤파이스토스의 정자로 가이아에게서 이제 막 태어난 아기 에리크토니오스를 바구니에 담아 케크롭스의 딸들에게 맡기고 절대로 열어보지 말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아테네에 아크로폴리스를 만들기 위한 산을 가지러 팔레네로 갔다. 그러나 케크롭스의 딸들은 아테나의 당부를 어기고 바구니를 열어 봤다. 이 사실을 까마귀로부터 전해 들은 아테나가 분노하여 옮기던 산을 집어 던졌는데(혹은 떨어뜨렸는데) 그것이 지금의 리카베투스산이 되었다고 한다.

(↑리카베투스 산 정상에서 본 아테네 시내 전경과 맞은편의 아크로폴리스)

 ('에리크토니오스'의 탄생 이야기는 <아테네 4일 고대 아고라> 편 참조) https://audience65.tistory.com/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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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베투스 산 정상에는 그리스 정교회의 아기오스 게오르기오스 성당(교회)(Παρεκκλήσι Αγίου Γεωργίου, Chapel of Agios Georgios)가 있다. 1834년에 지어진 이 성당은 외벽이 모두 흰색으로 칠해져 있고 우아한 돔이 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부활절 행사의 목적지이자 인기 있는 결혼식 장소라고 한다. 또 성당 앞에는 돌벽돌로 쌓아 올린 종탑도 있었다. 날이 맑아서인지 배경이 된 하늘색이 짙푸르게 선명하다.

성당 바로 아래에는 야외 레스토랑이 있는데 분위기는 꽤 고급스러워 보였으나 우리는 들어가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음식료 가격이 많이 비싸다고 한다.

(↑아기오스 게오르기오스 성당)
(↑리카베투스 산 정상의 종탑)

우리는 산 정상에서 다시 아래로 내려갈 때는 산책로(?등산로)를 따라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걸어갔다. 대체로 잘 닦여진 길 양 옆으로는 잘 가꿔진 꽃과 나무도 있어서 심심치는 않았다. 다만 경사가 높은 편이어서 만약 올라갈 때 이 길을 따라갔다면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았다.

(&uarr;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

 

산 아래로 내려와 명숙 자매와 헤어진 나는 어제 입장 시간을 놓쳐 들어가 보지 못한 제우스 신전으로 다시 갔다. 나는 여행 중 사전에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다녀야 할 곳을 미리 계획하는 편이만 모든 일이 내 예상대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서 오늘처럼 왔던 곳을 두번, 또는 여러 번 와야 하는 일이 생긴다. 하지만 어디에다 화를 내거나 따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어쩌겠는가? 귀찮고 피곤할지라도 다시 발품을 팔 수밖에!

정식 명칭이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Ναός του Ολυμπίου Διός, Temple of Olympian Zeus)인 이곳은 신들의 아버지인 제우스 신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BC515년 아테네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가 이곳에 제우스 신전을 짓기로 하고 착공했으나 곧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후 BC 174년에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왕국 에피파네스왕이 다시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기둥을 모두 세우고 지붕을 얹을 단계에서 공사는 다시 중단되었다. 그렇게 공사를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BC 86년에는 로마의 장군 술라가 이곳의 기둥들을 약탈해 로마 신전 건축에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다 132년(또는 131년)에 이르러서야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신전 건축은 그 끝을 보게 된다. 신전 완공을 기념하여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아테네를 방문했고 아테네인들은 이때의 하드리아누스 황제 방문을 기념하여 신전 서쪽에 개선문을 세웠다.

(하드리아누스 개선문은 <아네테 4일 하드리아누스 개선문> 편 참조) https://audience65.tistory.com/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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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당시에는 104개나 되는 코린트 양식의 기둥이 세워져 있던 그리스 최대의 신전으로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웅장하고 규모가 컸다고 한다. 또한 신전 안에는 황금과 상아로 만든 제우스상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파르테논 신전 안에 있던 아테나 여신상과 함께 2대 조각상으로 평가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4세기에 고트족에 의해 파괴되어 지금은 아쉽게도 건물은 모두 허물어지고 지름이 약 2m에 달하는 15개의 기둥만이 남아 화려했던 그 옛 시절의 영광을 추억하며 서 있다.

(↑제우스 신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으로 하드리아누스 개선문, 뒤로는 아크로폴리스가 보인다.) 
(↑기둥만 남은 제우스 신전)
(↑신전터 한쪽에 모아둔 기둥 조각들)

 

제우스 신전을 나와 다시 이동한 곳은 필로파포스 언덕(Philopappou Hill)에 있는 소크라테스의 감옥(Η Φυλακή του Σωκράτη, The Prison of Socrates)이다.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소크라테스(Σωκράτης, Socrates, BC 469∼399)는 제자인 플라톤, 그리고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서양 철학의 기초를 이루는 인물이다. 그는 평생 어떤 기록이나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야기나 그의 행적, 철학적 가르침 등은 플라톤이나 크세노폰 등의 제자, 또는 소크라테스에게 비판적이었던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 등의 저술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일화나 행적은 대부분이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석공소를 운영한 석공이자 조각가였던 아버지로부터 석공 기술을 배우며 철학, 기하학, 천문학 등을 공부했다. 30대 후반에서 40세까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대결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세 번에 걸쳐 중장보병으로 전투에 직접 참여했다. 40세 이후에는 교육자로 청년들의 교육에 힘썼고, BC 406년에는 공회의 원로 일원으로 1년간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추남으로도 알려져 있었는데, 외모지상주의 풍조가 있었던 아테네에서 실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미남 제자인 알키비아데스(Ἀλκιβιάδης, Alkibiades)가 아고라에서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연설을 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그의 아내인 크산티페는 못생긴 악처(惡妻)였다고 전해지는데, 집안 살림에 관심도 없고 무능했던 소크라테스 대신 소크라테스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석공소도 크산티페가 직접 운영했다. 그 과정에서 부부 사이에 잦은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부부관계가 파탄날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었다고 한다. 또한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를 내쳤다는 기록은 없고, 소크라테스가 독배(毒杯)를 마시고 죽자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BC 399년 봄 시인 멜레토스와 정치가 아니토스, 소피스트 뤼콘에 의해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들을 끌어들였고, 젊은이들을 현혹시켰다'는 명목으로 고발돼 재판에 회부된다. 이후 소크라테스는 아고라의 시민법정에 출두한다. 재판에서 그는 배심원 501명 중 유죄 281명, 무죄 220명의 근소한 차이로 유죄 선고를 받는다. 형량을 정하는 2차 재판에서 고발인은 사형을 주장했고 소크라테스는 유죄를 선고한 배심원들을 비난했다. 그 결과 그는 배심원들로부터 ‘괘씸죄’로 미움을 사게 되고 360명이 사형에 표를 던졌다. 그 즈음 아폴론 신의 탄생지 델로스 섬에서 종교 의식을 행하는 기간이어서 사형 집행이 한 달간 미뤄졌다. 이때 제자들은 간수를 매수해 감옥 문을 열어놓았다며 외국으로 달아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내가 억울하다는 이유로 그 결정을 회피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판단해야 한다. 폴리스의 결정에 대해서 승복하지 못할 때 모두가 회피하면 폴리스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탈출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고 기꺼이 독배를 마셨다고 한다. 플라톤은 이 과정을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자세히 소개해 놓았다.

(↑소크라테스의 감옥)

사실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 필로파포스 언덕에 있는 감옥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실제 소크라테스가 갇혔던 감옥은 아고라의 시민 법정과 인접한 곳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주춧돌만 남아 있는 상태로 당시 감옥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런 점을 감안해 아테네 당국이 이 필로파포스 언덕에 있는 감옥을 소크라테스가 투옥되었던 감옥이라고 안내하고 있단다. 아쉽지만 소크라테스가 생의 마지막에 있었던 장소는 찾을 수 없다는 얘기이다.

그가 했다고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사실 그가 한 말이 아니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일본의 법철학자 오다카 도모오가 1930년대 그의 저서 《법철학》에서 실정법주의(實定法主義)를 주장하며 쓴 글이라고 한다. 일제시대에 그가 이런 해석을 한 까닭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그간 의심도 품지 않고 아무런 확인도 없이 이 말을 써 왔던 것이 부끄럽다. 참고로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한 명인 에우렐이 말년에 쓴 《파타모닐리아》에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약을 몇 번이나 뒤엎어서 결국 마지막에 간수들이 억지로 사약을 먹였다는 기록이 있다고도 한다.

또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원래 델포이 아폴론 신전에 새겨진 여러 명구 중 하나로 평소 소크라테스가 자주 사용했던 말이었다고 한다.

(아폴론 신전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일화는 <그리스 델포이 고고 유적> 편 참조 https://audience65.tistory.com/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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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감옥이 있는 필로파포스 언덕 정상은 다음 날 야경을 보러 갈 계획이어서 언덕으로 올라가지 않고 발길을 돌려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다음 목적지로 향해 가던 중 아크로폴리스가 잘 보이는 고대 아고라 근처 어느 카페에서 치즈 케이크와 카푸치노로 점심을 대신하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카페에서 본 리카베투스 산과 아크로폴리스 그리고 카페 메뉴)

 

카페에서 나와 고대 아고라를 지나 케라메이코스(Κεραμεικός, Kerameikos)로 향했다. 케라메이코스는 앞서 살펴본 소크라테스와도 관련이 많은 곳이다. 소크라테스가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 살았던 곳이 이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의 삶이나 철학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곳이다.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지역에서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다양한 문화를 경험했을 것이다. 아테네 성 안의 사람들과는 달랐던 이런 경험이 곧 그의 철학적 바탕이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케라메이코스는 아테네시 외곽을 두른 성벽의 북서쪽 성문 바깥 동네로 BC 1200년경부터 BC 300년경까지 아테네 도시의 공동 묘지로서의 기능을 했던 곳이다.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년~BC 404년)에서 수많은 희생자들이 생기면서 그 전사자들의 무덤이 이곳에 많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아테네의 부유한 시민이나 공인들이 묻히면서 수많은 분묘와 함께 묘비, 부조 등의 장식들이 다수 발굴되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묘비석과 부조 등 유물들은 복제품으로 진품은 케라미코스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케라메이코스 전경과 부조들로 장식한 분묘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 아테네 3일 국립고고학박물관> 편 참조) https://audience65.tistory.com/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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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라메이코스는 대규모 도자기 공방이 늘어서 있던 예술과 문화의 터전으로 BC 9세기부터 로마 시대까지 번성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 동안 이곳 무덤 여기저기에서 발굴된 가마터가 15기나 된다고 하니 규모가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테네 전역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등지에도 생산품을 수출할 정도였다고 한다. 예전에는 케라메이코스의 아치형 문 사이 가운데로 에리다노스(Eridanos)라는 작은 강이 흘렀는데, 강물에 의해 흘러들어온 점토흙이 많았고 물과 땔감이 풍부했기 때문에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케라메이코스라는 지명은 케라모스라는 도공이 이곳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데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도공구역(陶工區域)’이라는 뜻인 케라메이코스는 '도자기'라는 의미의 영어 '세라믹(Ceramic)'의 어원이기도 하다.

페르시아 전쟁 중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때 아테네는 엄청난 피해를 힙고 폐허가 되었다. 이후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인들은 도시를 튼튼한 성곽으로 둘러싸기 위해 BC 478년에 데미스토클린 성벽(Θεμιστόκλειον τείχος, Themistoclean Wall)을 건설한다. 이로써 이 성벽은 아테네 북서쪽 외곽의 경계를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성벽을 따라 드나들 수 있는 열다섯 개의 성문을 만들었는데 가장 중요한 성문은 케라미코스 지역에 있었던 디필론 성문(Dipylon Gate)히에라 성문(또는 신성문 Sacred Gate)이었다. 

(↑에리다노스 강이 흐르던 곳과 데미스토크린 벽의 일부)

이 성벽의 정문인 디필론 성문은 ‘이중의 문’이란 뜻으로 통행량이 많고 가장 크고 화려했는데, 고대 묘지인 케라메이코스와 아테네 중심을 연결할 뿐 아니라  그리스의 여러 지역을 오가는 도로로 연결돼 있었다. 아테네의 바다쪽 관문인 피레우스(피레아스 Piraeus) 항구, 북쪽 보이오티아와 이어진 길이 있었고, 플라톤이 세운 사설 학원(학교)인 아카데미아로 가는 큰 길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신성문 앞에서 시작되는 신성한 길(The sacred Way)은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23㎞ 떨어진 비옥한 평원 엘레우시스(Eleusis)와 연결된다. 엘레우시스에 있는 데메테르 신전에서는 매년 9월에 비밀스런 종교의식인 엘레우시스 비의(秘儀)(Eleusinian Mysteries)가 행해졌다. 이때 아테네인들은 이 비의에 참가하기 위해 히에라 '호도스(Hiera Hodos)'라는 이 '신성한 길'을 따라 아테네를 출발했다고 한다.

한편 케라메이코스는 아테나 여신의 탄생을 기념하여 매년 7월에 열리는 판아테나이아 축제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판아테나이아 축제는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을 기리는 종교적 행사에서 시작됐으나 시 낭송, 음악 경연, 각종 운동 경기가 진행되는 축제가 되었다.(운동 경기는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에서 치뤄졌다.)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여인들의 일상복인 페플로스(Peplos)를 수레에 담아 금과 상아로 만든 아테나 여신상이 있는 파르테논 신전까지 옮기는 행렬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데미스토크린 정문인 디필론 성문이었다. 또한 매년 열리는 축제 외에 4년마다 더 큰 규모로 진행하는 대판아테나이아 축제(Great Panathenaea)도 이곳에서 시작했다. 이런 의미에서 축제의 시작 지점인 이 성문은 당시 가장 큰 문이었으며 기념비적인 구조물이었다.

또한 축제를 준비하고 진행하던 장소가 필요했는데, 축제에 바쳐진 동물들의 희생제를 올리고 그 음식을 나눠 먹은 곳이 디필론 성문과 신성문 사이에 있었던 폼페이온(Pompeion)이다. 폼페이온은 가로 70m, 세로 30m에 달하는 대규모 건물로 평소에는 축제를 위한 준비물과 도구들, 각종 제물을 보관하던 곳이기도 했다. BC 86년 로마가 아테네를 침략했을 때 신성문, 디필론과 폼페이온 등 케라메이코스의 주요 시설들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디필론 성문이 있었던 곳과 폼페이온. 모두 그 흔적만 남아 있다.)

(판아테나이아 축제에서 운동 경기가 열렸던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은 <그리스 아테네 4일 파나티나이코 경기장> 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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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테네 4일 전쟁 박물관, 리케이온, 파나티나이코 경기장, 하드리아누스 개선문, 고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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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라메이코스 유적지 정문에서 가까운 곳에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의 주요 전시물은 이곳 케라메이코스에서 발굴된 유물들로 무덤을 장식했던 각종 조형물이나 조각상, 무덤의 부장품, 가마터 등에서 발굴된 각종 도자기 등이다. 

BC 560년~550년경 작품인 묘비석 위에 세워진 조각품 스핑크스(Sphinx) 상과 쿠로스(Kouros) 상은 모두 신성문(Sacred Gate) 부근에서 발굴된 유물들이다. 힘이 넘치고 움직임이 살아 있는 듯한 황소상도 묘비석 위에 올려진 조각품인데 무덤의 주인은 디오니소스(Dionysios)라는 인물로 BC 4세기 중엽에 헤라 신전에서 보물지기로 있었다고 한다. 단순하고 간결한 사자상은 BC 590년~580년 경 작품으로 역시 신성문 근처에서 발굴되었다.

(↑스핑크스 상과 쿠로스 상(좌), 황소상(중앙), 사자 상)

데메트리아(Demetria)와 팜필레(Pamphile) 자매의 부조는 BC 325년~310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데 부조로서는 꽤 깊이감이 있고 각각의 인물 조각이 아주 섬세하고 정교해 눈길을 끈다. 묘비석을 장식한 것은 인물, 동물, 오벨리스크, 화병 등 다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데메트리아와 팜필레 자매 부조와 그외 여러 부조들)

묘지를 장식한 것들 중에는 길고 큰 물병 같은 것이 있는데 이를 '루트로포로스(Loutrophoros)'라고 한단다. 이 커다란 물병은 결혼식 전날 밤 신랑과 신부의 목욕 의식에 사용되었다. 그래서 결혼하기 전에 죽은 사람의 무덤에는 대개 이 루트로포로스 올려 장식했다고 한다.

(↑여러 도자기 유물들)

 

 

◈ 일일 경비: €19.4(≒₩26,100)

리카베투스 입구 → 산 정상 택시 €5/3인

아크로폴리스 근처 카페(카푸치노, 치즈케이크) €13

시장(호박, 오이, 순무, 당근, 시금치, 휴지 2개, 우유)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