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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2021년 12월 그리스

그리스 델포이 고고 유적, 델포이 → 나플리오

12월 18일(토) 델포이나플리오(Nafplio) (8,800보 / 5.3km (3시간 40분 / 292km))

 

  • 델포이(Delphoe) 숙소 → 델포이 고고 유적지 및 박물관 → 리오 안타리오 다리→ 나플리오(Nafplio)

 

우리는 오늘 오전에 유적지와 박물관을 둘러보고 오후에 남쪽 나플리오(Nafplio)까지 약 300km 정도를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왔다. 입장권을 사기 위해 델포이 유적지(Archaeological Site of Delphi) 매표소로 갔더니 비수기인 겨울철인데다가 날씨도 흐려서인지 드문드문 사람이 있긴 했으나 주변은 아주 한산했다. 우리는 표를 산 후 오디오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먼저 유적지 입구를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해발 2,457m 파르나소스 산(Παρνασσός, Mt. Parnassos)의 남서쪽 자락에 자리 잡은 델포이는 BC 800년에 처음 아폴론 성역이 들어서면서 종교적, 지정학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어느 날 문뜩 세상의 중심이 어딘지 궁금했던 제우스는 세상의 양쪽 끝에서 독수리 두 마리를 날려 보냈는데 양쪽 독수리가 서로 마주친 장소가 바로 델포이였다. 제우스는 델포이가 세상의 중심(땅(세상)의 배꼽)이라는 뜻으로 '옴파로스(Ομφαλος)'라는 원뿔형 석상을 세웠다. 이후 제우스는 그의 아들 아폴론이 태어나자 예언을 관장하는 능력을 주고 델포이로 보낸다. 당시 델포이의 이름은 푸톤(또는 피토, 퓌토)이었는데 이는 이 지역이 원래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아들이자 뱀 괴물 형상을 한 '피톤(Πύθων, Python)'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델포이에 온 아폴론은 자신의 신전을 짓고자 했으나 피톤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화살로 쏘아 물리친다. 이후 그는 이곳의 지명을 델포이로 바꾸고 신전을 지어 여사제 '피티아(또는 퓌티아 Πυθία)'를 통해 신탁을 내리게 했다고 한다.

우리는 유적지로 가는 입구를 지나 경사진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이 입구에서부터 아폴론 신전이 있는 곳까지의 낮은 경사로를 신성한 길(Sacred Way)이라고 한다. 아마 저마다의 사연으로 신탁을 받으러 온 인간들은 성스럽고 경건한 마음으로 이 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신전으로 올랐을 것이다.

(↑파르나 소스 산 아래 자리잡은 델포이 유적과 신전으로 오르는 '신성한 길')

델포이는 무엇보다 신탁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여러 도시 국가에서 온 중요한 결정을 앞둔 수많은 왕과 현자들이 신의 뜻을 알기 위해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으로 몰려왔다. 더욱이 아폴론 신전은 1년 중 따뜻한 9개월 동안만 열렸다고 한다. 때문에 신전이 열리는 기간에는 신탁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무척 붐볐다고 한다. 또 신탁을 받으려는 도시 국가나 개인 할 것 없이 모두 '패리노스'라는 세금(보통을 금으로 지불했다.)을 내야 했다. 그래서 그리스의 각 도시 국가들은 자신들의 보물을 저장해 둔 보물 창고를 이곳에 짓기 시작했다. 그런 연유로 신전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유적들의 대부분은 당시 도시 국가들의 보물 창고가 있었던 자리라 한다. 이들 중 현재 기둥 몇 개와 터만 남아 있는 시프노스 인의 보물 창고(Treasury of the Siphnians)는 델포이 박물관에서 창고를 장식했던 부조물들을 볼 수 있다. 또 시프노스 인의 창고 근처에 원형의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아테네 인의 보물 창고(Treasury of the Athenians)가 남아 있다. 이 창고는 BC 507년~508년 사이에 건축된 도리아식의 작은 건물로 정면의 주랑이 벽 끝의 두 기둥 사이에 있고 외부 벽면은 부조로 장식돼 있다. 

옴파로스(ὀμφαλός, Omphalos)는 그리스어로 '배꼽'을 의미한다. 신화 속에서 제우스가 세상의 양 끝에서 두 마리의 독수리를 날려 그 독수리들이 만난 자리가 세상의 중심으로 믿었고 그 자리에 만든 석조 유물이다. 한편으로 이 돌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가 자신이 앞으로 태어날 자식에 의해 왕좌에서 쫓겨날 운명이라는 신탁을 듣고 부인 레아가 낳은 자식들을 차례로 삼켜 버렸다. 그러자 레아가 어린 제우스를 살리기 위해 강보에 돌멩이를 넣어 크로노스를 속여 삼키게 한다. 델포이의 이 옴파로스는 바로 크노로스가 삼켰다 토해낸 돌이라는 것이다. 

근처에는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몸을 꼬아 올라가는 형상을 묘사한 청동 기둥이 있다. 이 청동 뱀 기둥(Serpent column)은 BC 478년 페르시아 전쟁 중 그리스가 페르시아와 싸워 크게 승리한 플라타이아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페르시아군으로부터 노획한 청동 무기들을 녹여서 만들었다. 이 전투에 참전한 31개의 도시 국가들의 이름을 기둥 밑에 새겼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26년에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로 가져가 히포드롬 광장(Hippodrome Square, 또는 술탄 아흐메트 광장)에 세운 것이다. 현재 델포이에 있는 이 청동 기둥은 2015년에 만든 복제품이다. 원래 높이는 8미터로 기둥 꼭대기에 세 마리의 뱀 머리 위에  황금 그릇(솥)이 있었지만 지금은 윗 부분이 훼손된 상태로 5.5m의 기둥만 남아 있다. 황금 그릇은 지금 볼 수 없지만 세 마리의 뱀 머리 중 하나는 터키 이스탄불의 고고학 박물관에 또 다른 하나는 영국 대영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옴파로스와 청동 뱀 기둥)

도리스(도리아) 양식으로 지어진 아폴론 신전(Απόλλων ναός, Temple of Apollo)은 가로 60m, 세로 23m로 외벽에서 38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원래 최초 신전은 월계수 나무로 지어졌으나 여러 번의 자연 재해와 BC 548년 대화재 이후로 대리석 건물로 재건되었다. 신전은 전실, 후실, 신실로 총 3개의 방으로 나뉘었는데 신실 안에는 여사제인 '피티아'만이 들어갈 수 있는 신탁소가 있었다. 신화에서 아폴론은 그가 싸워 죽였던 뱀 괴물 피톤의 아내 피티아를 인간의 몸으로 바꿔 첫 여사제(무녀)로 임명했다고 한다.

1년에 9개월만 진행했던 아폴론 신전에서의 신탁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성스럽고 엄격하게 이루어졌다. 신의 대답을 들은 피티아는 몽환적인 상태에서 혼자 중얼거리듯 신탁의 결과를 말했다. 이 말을 다른 남사제들이 듣고 받아 적은 후 해석해서 신탁을 요청한 사람에게 알려 주었다고 한다. 한편 피티아가 어떻게 신으로부터 예언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력한 것은 유황 가스로 인한 '환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신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피티아는 마지막에 성소 안의 바닥에서 나오는 수증기를 들이마셨는데 이 수증기 속 환각 성분에 취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 신전이 있는 파르나소스 산 하부 지역이 테르모필레('뜨거운 입구'라는 뜻)인데 이곳은 예로부터 유황 온천이 많은 곳이었다. 이런 신비로운 자연 현상과 더불어 당시 고대인들은 신의 거룩함과 영험함을 실감했을 것이고 신탁에 대한 믿음은 더욱 굳건해졌을 것이다.

이곳 아폴론 신전과 관련해 유명한 소크라테스(Σωκράτης, Socrates)의 일화가 전해진다. 소크라테스의 친구이자 제자인 카이레폰(Χαιρεφῶν, Chaerephon)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냐고 신에게 물었고 피티아에게서 소크라테스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가 기쁜 마음으로 이 소식을 전하자 늘 자신의 무지함을 알고 있었던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보다 더 현명한 사람을 찾으려 세상의 여러 자타공인 현자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그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안다는 것에 대해 확실한 지식을 가지지도 못하고 참된 지혜를 알지도 못하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자만에 빠져 있었다. 이를 통해 소크라테스는 이들과는 달리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러한 신탁이 내려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신이 자신에게 준 의무를 수행하는 차원에서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쳐주려 했다고 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은 아폴론 신전에 새겨진 여러 현자들의 낙서 중 하나로 소크라테스가 직접 한 말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그가 사람들을 깨우치쳐 주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명구였던 것이다.

(↑아폴론 신전)

아폴론 신전 바로 위쪽에 고대 원형 극장(Amphitheater)이 비교적 잘 보존된 채로 남아 있다. 원래는 목조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되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BC 4세기 로마 제국 시대에 석조로 건축된 것이다. 돌로 만든 지름 7m, 약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35열의 관람석과 분장실, 무대를 갖춘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극장은 주로 피티아 제전 기간 동안 연극과 음악을 공연하는 데 사용되었다. 매 4년마다 치뤄진 피티아(Pythian) 제전은 아폴론이 피톤과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된 축제이다. 5일 간 치뤄지는 축제 기간 동안 문학 예술 경연과 운동 경기 등이 열렸으며 그리스 여러 도시 국가들이 참여하는 범그리스적인 행사였다.

참고로 그리스에는 아폴론 신을 위한 델포이의 피티아 제전을 비롯해 고대부터 제우스 신의 신전이 있었던 올림피아(Olympia) 언덕에서 개최된 올림피아 제전, 코린트 이스트모스의 포세이돈 성역에서 개최된 이스트미아(Isthmian) 제전, 네메아(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동부에 있는 엘리소스 강 골짜기 꼭대기 근처에 있는 고대 유적지)의 제우스의 성역에서 개최된 네메아(Nemean) 제전이 있었는데 이를 4대 제전이라 한다. 이중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것은 올림피아 제전이다.

원형 극장에서 다시 위로 올라가면 피티아 제전에서 운동 경기가 열렸던 고대 스타디온(στάδιον, stadion)이 있다. 원래는 그냥 넓은 공터 형태였으나 기원후 2세기에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관람석을 지어 기부해 관람객 6,500명 수용할 수 있는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스타디온'이란 말은 그리스 내의 각 지역에 있던 경기장의 길이 단위로도 쓰였는데 각 경기장의 크기가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각 스타디온의 길이도 달랐다. 이곳 델포이 경기장의 1 스타디온은 177.7m, 올림피아의 경기장 1 스타디온은 192.25m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갑자기 눈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면서 날씨가 험악해지는 바람에 올라가는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없었고 한동안 우왕좌왕하다가 너무 추워서 더 지체하지 못하고 그냥 박물관으로 가기로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의 날씨가 원망스럽고 운동장 위에 서서 피티아 제전의 열띤 경기 장면을 상상해 보고 원형 극장과 아폴론 신전을 담은 전경을 내려다볼 수 없어서 못내 아쉽다.

(사진은 위키피디아 참고)

(↑델포이의 스타디온 전경과 출발선 표지, 출처: 위키피디아)

 

델포이의 고고학 박물관은 모두 델포이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따라서 동선이 좀 겹치더라도 유적지를 먼저 둘러보고 박물관에 오면 현장에 있던 유물의 모습을 좀 더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박물관 내부로 들어서니 온기가 눈바람에 얼었던 몸을 따뜻하게 녹여 주었다. 델피 고고학 박물관(Archaeological Museum of Delphi)은 1904 최초로 지어졌는데 이후 1938 규모를 키워 증축되었다. 전시품을 점진적으로 옮겨가며 재배열되었다가 1980년에 완성되었다. 

나는 오디어 가이드가 알려 주는 대로 먼저 3번 방의 클레오비스(Kleobis)와 비톤(Biton) 형제상(또는 아르고스(Argos)의 쌍둥이 형제)앞으로 갔다. 작은 도시 국가 아르고스에 살았던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는 키디페라는 헤라 신전의 여사제의 아들들이었다. 어느 날 헤라 축제가 시작되어 어머니가 제물을 싣고 급히 신전으로 가야 했으나 수레를 크는 소들이 미처 오지 못했다. 이에 두 형제는 직접 수레를 끌어 45스타디온(약10km)을 달려 어머니를 신전에 모셔다 드린 후 지쳐 쓰러져 잠들었다. 이를 본 모든 아르고스인들이 아들들을 칭송했다. 어머니는 너무 기뻐서 헤라 여신에게 착한 두 아들들에게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헤라는 이들에게 가장 최상의 선물인 천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죽음을 선사했다. 그렇게 이 두 아들들은 명예와 칭송, 젊음을 모두 간직한 채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헤로도토스(Herodotos)의 '역사'에서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솔론에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자 솔론이 답하는 과정에서 이들 형제 이야기가 나온다. 솔론은 부와 명예, 지위를 자랑하던 크로이소스 왕에게 그보다는 삶의 끝을 보아야 행복한지 알 수 있다고 대답하고 그의 어리석음을 꾸짖어 돌려보냈다고 한다.

4번 방으로 이동하면 아폴론(Απόλλων, Apollon)과 그의 쌍둥이 누나 아르테미스(Ἄρτεμις, Artemis) 그리고 이 둘의 어머니인 레토(Λητώ, Leto)금상아상(Chryselephantine Statues)이 전시돼 있다. 많이 훼손되어 전체 모습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시실에는 유물 조각들을 맞추어 대략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게 했다. 이 조각상들은 아폴론 신전으로 가는 길인 '신성한 길'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부유한 왕으로 이름났던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왕이 봉헌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 세 개의 금상아상은 모두 머리와 몸체는 상아로 만들어졌고 그외 머리카락과 장신구 등은 모두 금으로 만들어졌다. 왼쪽 첫번째가 아폴론, 가운데 황금 왕관과 귀걸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르테미스, 오른쪽이 어머니인 레토의 조각상이다.

5번 방의 BC 6세기 아르카익(Archaic) 시기의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이들 중 압도적인 크기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낙소스의 스핑크스(Sphinx of Naxos)이다. 아폴론 성역 안에 장식된 여러 봉헌물 중 하나로 높이가 2.32m, 원래 스핑크스가 올려져 있던 기둥을 합친 전체 높이는 12m에 달하는 조각상이다. 신전을 지키는 수호신의 의미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스핑크스는 이집트가 원조이지만 이집트의 것과는 달리 여성의 얼굴에 날개가 달린 사자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방에는 또 시프노스 인의 보물 창고(Treasury of the Siphnians)의 외벽을 장식했던 페디먼트(pediment, 경사진 지붕 한 쌍으로 만들어진 삼각형의 벽면) 조각상도 있고 건축물을 받치는 여인을 조각한 기둥인 카리아티드(Caryatid)도 볼 수 있다. 

(↑시프노스 인의 보물 창고 동쪽 페디먼트와 카리아티드)

박물관의 각 방을 천천히 둘러보며 11번 방에 다달았다. 이 방의 전시물들은 BC 4세기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조각상들인데 아테네 인들의 봉헌물이었다. 델포이가 우주의 중심임을 나타내기 위해 만든 옴파로스('배꼽'의 뜻)는 원래 아폴론 신전 안 성소에 하나만 있었지만 이후 신전 밖이나 그리스 다른 지역에도 만들어졌다. 이 옴파로스는 원래 뒤에 있는 춤추는 무희(The column of the dancers)의 조각상 위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 전 유적지에서 본 아무런 조각이 없는 민밋한 옴파로스와는 모양이 조금 다른데 그 이유는 유적지의 것이 초기의 것이고 박물관에 있는 것과 같이 조각으로 장식된 것은 후기의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다음으로 옮겨간 12번 방에는 BC 2세기부터 AD 2세기까지 로마 제국 시대에 제작된 델포이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이 방의 조각상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예쁜 미소년의 모습을 한 안티누스(Ἀντίνοος, Antinous)일 것이다. 지금의 터키 북서부 지방인 비티니아 출신인 안티누스는 로마 하드리아누스(Hadrianus) 황제의 신하이자 동성 애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여러 정복지를 순회하던 중 안티누스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 안티누스는 황제의 최측근으로서 그를 보필하며 로마 제국 순회에 늘 동행했다. 평소 그리스의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남달랐다는 하드리아누스는 델포이에  두번이나 방문했는데 특히 129년 두번째 방문에는 안티누스와 동행했다고 한다.

그러다 130년 이집트를 방문하던 안티누스가 나일강에서 악어에게 물려 죽자 하드리아누스는 그의 죽음을 추모하며 로마의 신으로 추대했다. 당시 이집트 지방에는 나일강에서 악어에 물려 죽으면 신이 된다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안티누스를 신으로 모시는 안티누스 신앙을 믿었고 이집트를 비롯해 지중해 문화권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안티누스의 입상과 흉상)

마지막으로 갔던 13번 방은 오직 하나의 유물을 위한 전시실인데 그 주인공은 청동 마부상(Ηνίοχος, The Charioteer)이다. 1.8m의 이 조각상은 1896년 아폴론 성역에서 발견되었는데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이자 고대 그리스 조각 작품 중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동상은 BC 478년 또는 474년에 피티아 제전에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위치해 있던 겔라의 선수들이 참여해(피티아 제전에는 그리스 뿐만 아니라 로마의 도시 국가나 이집에서도 참가했다고 한다.) 전차 경기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겔라의 왕 폴리잘루스가 헌납한 것이라고 한다. 이 기념물은 원래 마차와 네 마리의 말, 그리고 두 명의 마부가 있는 큰 조각상이었다. 발견 당시 마부상과 함께 전차, 고삐와 말 등의 일부도 함께 출토되었다.

현재 이곳에 전시된 마부상은 처음부터 여덟 개의 조각으로 나누어 주조한 후 하나로 조립하는 방식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이 마부상은 전차 경기를 막 끝낸 후의 순간(어떤 이는 경기 시작 직전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약간 긴장한 모습이라고도 한다.)을 포착해 마부의 모습을 섬세하고 세밀하게 묘사했다. 마부상의 주재료는 청동이지만 입술은 구리, 속눈썹과 머리띠는 은, 눈은 유리와 돌을 사용해 색깔과 질감을 다르게 표현했다. 또 얼굴을 자세히 보면 눈동자, 흰자위, 속눈썹까지 세밀하게 묘사해 놓아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청동 마부상과 복원도)

델포이 유적지에 있던 청동 뱀 기둥을 약탈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청동 마부상과 함께 있던 네 마리의 대형 청동 말도 콘스탄티노플로 반출해 갔다. 그런데 이 네 마리의 말은 현재 이스탄불이 아닌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의 박물관에 있다. 왜냐하면 1203년에 베네치아의 지배자 단돌로(Dandolo)가 십자군 원정에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을 때 히포드롬 광장에 있던 청동 말 조각상을 베네치아로 가져갔기 때문다. 현재 이 네 마리의 청동 말 조각상 진품은 산 마르코 성당 안 박물관에 있고 성 마르코의 유해를 운구한 말을 상징하는 의미으로 산 마르코 성당의 정면 테라스에 모조품이 설치되어 있다.

 

델포이 유적지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박물관과 아폴론 성역, 원형극장, 스타디움이 있는 위쪽과 김나지움, 아테나 프로나이아 성역, 톨로스(Tholos, 도리아식 원형 건물) 등이 있는 도로 아래쪽 구역으로 나뉜다. 그래서 우리는 박물관을 나와 아래쪽 유적지를 둘러보고자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박물관에서 나오자 눈보라가 여전히 사나웠고 옅은 안개가 주위를 덮고 있어서 도저히 나머지 유적지를 가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또 그렇게 아쉬움을 남겨둔 채 그만 델포이를 떠나기로 했다.

(↑눈보라 속 델포이, 멀리 기둥 세 개만 남은 '톨로스'가 보인다.)

우리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리오-안티리오 다리를 건너 동쪽 해안 도로를 따라 나플리오로 가기로 했다. 눈보라가 치는 산길을 조심스럽게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이런 날씨가 계속된다면 안전하게 나플리오까지 잘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고도를 낮추며 천천히 산길을 따라 내려갈수록 눈이 비로 바뀌더니 서서히 구름도 걷히고 있었다. 드디어 산길을 다 녀려와 해안가에 다달았을 때는 환하게 해가 비치고 투명하고 맑은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델포이에서 해안으로 내려오는 길)

그렇게 우리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해안길을 따라 달리다가 이름도 알 수 없는 곳에 차를 세워 풍경도 감상하고 점심도 먹고 가기로 했다. 우리가 우여곡절 끝에 겨우 찾아 간 식당은 Panseloinos Seafood Tavern이라는 이름의 해산물 전문점이었다. 오징어, 문어, 새우 요리를 시켰는데 재료가 싱싱했던 까닭에 역시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식당의 앞 맑고 푸른 바닷가에 서서 눈부신 풍경을 감상했다. 그리고 우리가 지나온 길을 짚어보고 불과 한두 시간 사이에 변화무쌍한 날씨 변화에 새삼 놀라워했다.

(↑식당과 식당 앞 풍경)

우리는 느긋하게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시 차를 달려 리오-안티리오 다리(Γέφυρα Ρίου-Αντιρρίου, Rio-Antirio bridge)에 닿았다. 리오-안티리오 다리는 그리스 코린토스 만에 있는 것으로 본토의 '안티리오'와 펠로폰니소스 반도의 '리오'를 연결한다. 처음 리오와 안티리오를 연결하는 다리 건설 구상했던 19세기의 그리스 총리 하릴라오스 트리쿠피스의 이름을 딴 공식 명칭은 '하릴라오스 트리쿠피스 다리'라고 한다. 2004년에 완공된 이 다리는 너비 27.2m, 총 길이 2,883m에 이르는 사장교이다. 사장교(斜張橋, Cable Stayed Bridge)는 교각 위에 높은 주탑을 세우고 여기에 여러 개의 케이블을 사선으로 교량에 연결해서 케이블이 교량을 직접 당겨 주탑에서 하중을 견디는 방식으로 지은 것이다. 이 다리는 사장교 중 크고 긴 다리라 할 수 있는데 모두 네 개의 주탑이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장교는 총길이 21.38km에 이르는 인천대교가 있다.

리오-안티리오 다리를 건너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들어서자 날씨는 다시 흐려지고 이내 비가 퍼붇기 시작했다. 차안에 있어 다행이긴 했으나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해안도로를 따라 천천히 조심스럽게 차를 몰아 해질 무렵에 목적지인 나플리오(Ναύπλιο, Nafplio)에 무사히 도착했다. 

(↑리오-안티리오 다리와 해질녘의 나플리오 팔라미디 성채(Palamidi Fortress citadel))

 

 

 

◈ 일일 경비: €103.9/3(≒₩46,300)

입장료(델피 유적지 및 박물관) €18, 점심(오징어 튀김, 구운 문어, 새우, 음료) €49, 도로비(리오-안티리오 다리13.5 포함) €23.55, 식료품(빵, 우유, 생선, 감자, 파, 햄) €1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