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공원을 반쯤 돌아나와 다시 걸어간 곳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 본격적인 영주동의 산복도로다. 부산은 유난히 산이 많은 지형이기도 하지만 한국전쟁 중 피난민들이 몰려오면서 산비탈에 집들이 들어서고 산복도로가 생겨나기 시작했단다. 저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하늘까지라도 닿을 듯이 길게 이어진 계단, 그 계단 양쪽으로 서로 마주보며 옹기종기 집들이 들어서 있다. 그 오래지 않은 지난 시절 삶의 애환이 켜켜이 쌓여 한 계단 한 계단 저리 긴 길을 만들었나 보다.
오늘 길을 안내하는 주 선생은 이 골목길을 걷다 만나게 되는 집들을 보면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을 대충 짐작해 볼 수 있다고 한다. 꽃이나 채소를 가꾸는 집은 부지런하고 정갈한 할머니가 살고 있고, 문 앞이 깨끗하지 않고 쓰레기가 나뒹구는 집은 게으른 홀아비가 살고 있을 거란다. 믿거나 말거나 재미있는 상상을 하며 사람들의 온기가 느겨지는 집들을 지난다.
↑길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선다.
↑길게 이어진 계단
골목을 따라 걸어가니 알록달록 밝은 색으로 벽면을 칠한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길 한쪽에는 전망을 바라볼 수 있도록 작은 휴식 공간도 마련해 두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곳은 공영 주차장의 옥상이다. 걸어 나와 비탈진 벽면을 보니 예쁜 색으로 장식도 했다. 밝게 색을 칠한 이 동네 집들과도 잘 어울린다. 최근 여기저기 마을마다 벽화 그려 넣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데 이 마을은 그림대신 집 주인의 취향대로 벽면을 단색으로 칠한 것이 특이하다. 그래서 이름이 색채 마을이란다.
↑휴식 공간으로 활용한 주차장 옥상과 벽면
↑색채 마을
마을을 나오니 버스가 다니는 중복도로가 나온다. 중구 사회복지관을 지나 다시 계단을 따라 골목을 내려간다. 한낮 햇볕이 잘 드는 곳에는 아이 있는 집의 빨래도 널려 있고, 계단 옆으로 누군가 솜씨 좋게 가꾼 작은 텃밭도 보인다. 골목 끝에서는 경사가 아찔한 도로를 오르는 오토바이도 만났다.
↑급한 경사로를 오르는 오토바이가 신기하다.
골목 골목 사람 사는 집들을 지나 여러 계단과 경사로를 걸었더니 드디어 큰길이 나온다. 그렇게 만난 길은 중구로! 이 길에서 가톨릭센터와 메리놀병원 중간쯤 복병산 체육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다시 계단을 올라가면 부산지방 기상청이 보인다. 들어가 볼 수는 없어 입구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복병산길
↑올라가는 입구가 재미있게 장식돼 있다.
근처 골목에서 각각 재질이 다른 전봇대를 발견했다. 안내를 하던 주 선생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봇대의 재질은 나무, 콘크리트, 금속으로 변화해 왔는데 이 골목에서는 그 변천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세 개의 전봇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거의 백년의 시간을 한 자리에서 조우하는 것이라며 흥분한다.
↑셋 중 가장 오래된 나무 전봇대
↑콘크리트와 금속으로 된 젓봇대가 나란히 서 있다.
기상청에서 남성여고를 끼고 골목을 계속 내려가면 중앙동, 동광동 인쇄골목으로 이어진다. 유심히 찾아보면 일제 시대 지어진 오래된 옛집들을 만날 수 있는 이 길을 <천지인(天紙人)>이라 하는데 땅 지(地)를 쓰지 않고 종이 지(紙)를 쓰는 이유는 인쇄골목과 관련 있다. 최근 이 골목길은 복병산 정상 기상청 근처는 하늘을, 인쇄골목은 종이(책)를 그리고 나머지 일부는 사람을 주제로 벽을 장식했다. 벽면에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 작품을 설치한 곳도 있는데 천천히 걸어가며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이 길의 벽화와 설치물들에는 대부분 작가명과 작품명이 있다.
↑인쇄 골목
드디어 도착한 인쇄골목! 이곳의 한 작은 골목을 들어서면 번호가 붙은 <또따또가>라는 빨간 간판이 여기저기에 보인다. 이 간판이 붙은 곳은 그 동안 출판사, 화랑들이 이곳을 떠나면서 공동화된 이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여러 예술가들에게 제공한 창작 공간이란다. 문학, 미술, 음악, 공연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들어와 작업 공간이나 공연, 전시, 강연장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 골목에는 근처 벽화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그림이 있다. 커다란 책장을 그린 이 그림은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우리도 이 앞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골목 끝자락 즈음에서 벽면에 붙어 있는 빨간 색 문을 열어 봤다. 벽장 안에는 스케치한 그림들을 보관해 두었다. 섬세하게 그린 그림들을 한장씩 넘겨 보는 재미에 한동안 떠나지 못하고 서 있었다. 다만 관리가 소홀해 일부 그림들이 훼손돼 있어 안타까웠다. 관이든 민이든, 거주민이든 여행객이든 어떤 주체를 막론하고 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뿐 아니라 이를 지키고 잘 보존하려는 마음과 노력이 더해져야 할 것 같다.
↑책장 벽화
↑예술창작공간 또따또가
↑그림이 들어 있는 이 빨간색 벽장은 <인쇄골목사전>이다.
↑인쇄소를 그린 벽화
오후 두 시 반에 시작한 산복도로, 골목길 걷기는 거의 6시가 되어서 마무리가 되었다. 오늘 걸어온 길은 그 동안 자주 지나던 곳이라 새로울 것이 뭐 있겠나 싶었는데 의외로 모르는 것이 참 많았다. 익숙한 것들에서 새로움을 발견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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