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에서 후아힌까지는 기차로 가 보기로 했다. 그래서 사전에 태국 철도 홈페이지에서 표를 예매했다. 오전 출발 기차를 찾았으나 없어서 오후 3시 무렵 기차를 타야 해서 시간을 최대한 맞춰 호텔 체크아웃을 했다. 체크아웃 후에도 로비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느지막이 그랩으로 차를 불렀다.
차는 방콕 도심을 지나 다소 한산한 길로 진입했는데, 이내 멈춘 곳은 거대한 신축 건물 앞이었다. 이 건물은 2021년 8월에 개통했다는 크룽 텝 아핏왓 중앙역(Krung Thep Aphiwat Central Terminal)이었다. 2021년 8월 첫 시범 운행을 시작한 이 역은 원래 방 수 역이 있던 자리에 대규모의 기차역을 신축한 것으로 '방 수 중앙역(สถานีกลางบางซื่อ, Bang Sue Grand Station)'으로도 불린다. 2023년 1월 19일부터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장거리 철도 서비스가 이루어지면서 기존에 있던 '후 아람퐁 기차역'을 대체하여 방콕 중앙역이 되었다. 내가 처음 도착해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란 만큼 이 역은 약 600m에 달하는 길이에 총 26개 승강장을 갖추고 있어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철도역이라고 한다.
외부에서 본 것과 같이 역사 내부도 한산한 편이었다. 이유는 워낙 규모가 큰 탓도 있고 아직 많은 철도 노선이 이곳으로 다 옮겨오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제대로 찾아 온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유니폼을 입은 직원에게 휴대전화에 저장된 표를 보였더니 그는 승차장 앞 대기 지역을 안내해 준다. 새 건물이라 전체적으로 깔금했고, 음료나 간단한 먹을거리를 파는 매점도 있었다. 출발 시간이 1시간 이상 남아 있어서 나는 간식거리도 사고 화장실도 다녀왔다. 긴 기다림 끝에 개찰구 앞으로 대기줄이 만들어졌고, 직원들은 노인과 장애인들을 먼저 엘리베이터로 안내해 준다. 그렇게 긴 줄이 어느 정도 사라진 후 나도 개찰구를 지나 2층 승차장으로 갔다. 나는 이미 기다리고 있던 기차에 올라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시간이 되자 기차는 천천히 출발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역에서 정차했다. 나는 그때마다 구글 지도로 대략적인 위치를 계속 확인하면서 예정 도착 시각에 맞춰 짐을 챙겼다. 예정된 시각보다 다소 지체되기는 했지만 그렇게 기차는 저녁 7시 무렵 후하인 기차역(หัวหิน สถานีรถไฟ, Hua Hin railway station)에 도착했다. 밖은 이미 어두어져 있었으나 13년만에 다시 찾은 후아힌에 대한 감흥 탓이었을까? 나는 천천히 역사(驛舍)를 나오면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그런데 그때에 비해 역이 새 건물인 듯 보였고 많이 커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 정확하지 않은 내 기억 탓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역사를 빠져나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은 옛 역사 근처에 새로 지어 2023년 12월 11일에 문을 연 새 건물이었다. 나중에 후아힌을 떠나기 하루 전날 나는 이곳 근처에 있는 옛 역사를 다시 찾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모두 옮겨가고 낡은 건물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던 때문이었는지 내 기억 속의 건물보다 더 작고 소박해 보였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내 기억은 점점 흐릿해지고, 나는 또 낯선 곳에 와 있고···. 순간 나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역사를 빠져나오자 택시 기사가 다가왔다. 해가 진 저녁 시간인데다가 여자 기사라 안심이 되기도 했고, 몸도 조금 지친 상태라 흥정 없이 내가 묵을 숙소 이름을 말하고 100바트(약 3,800원)에 가기로 했다. 택시에서 내려 도착한 숙소는 후아힌에서 남북으로 길게 뻗은 주도로(Phet Kasem Rd.)에 인접해 있는 라 카시타 콘도(La Casita Hua Hin)이다. 이 숙소는 올해 한 TV 여행 프로그램에 소개됐는데, 그때 나도 후아힌에서 오래 머물게 된다면 가고 싶다는 생각에 눈여겨 봐 둔 곳이다. 이 콘도는 편안한 소파, 넓은 탁자가 갖춰져 있는 실내 장식이 화려한 로비와 함께 여러 동의 건물 중앙에 야외 휴게 시설과 산책로를 따라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 등 공용 공간이 꽤 잘 갖춰져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콘도의 가장 큰 매력이자 장점은 정원 중앙에 길게 놓인 야외 수영장일 것이다. 넓고 긴 이 수영장에는 작고 아담한 물 미끄럼틀(water slide), 샤워 부스(shower booth), 선베드(sun bed) 등이 갖춰져 있다. 그리고 해가 지기 전까지 안전 요원이 배치돼 있어서 아이들과 놀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헬스장에 면해 있는 폭이 넓은 쪽은 성인이 충분히 이용할 정도의 깊이였고, 건물 출입구 쪽으로 길게 뻗은 쪽은 폭이 좁고 깊이가 낮아 아이들이 이용하기 적당하다.
나는 후아힌에서 머물기로 예정한 3주 기간 중 10박을 아고다를 통해 이 숙소를 미리 예약했다.($188≒₩260,000) 일단 입주해 보고 마음이 바뀌거나 방 상태가 좋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려고 했으나, 이틀 후 나는 나머지 10박도 계속 이곳에 머물기로 하고 다시 예약했다.
건물 입구에서 직원들에게 예약한 방 번호를 알려 주니 입구 바로 앞에 있는 건물로 가라고 한다. 건물에는 엘리베이터 2대가 있어서 매번 오랜 기다림 없이 이동할 수 있어 편리했다.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 건물인 만큼 방은 전체적으로 깔끔했다. 방 구조나 인테리어는 태국의 여느 콘도와 비슷해서 입구에 화장실과 싱크대가 마주보고 있었고, 방은 중간 문으로 분리할 수 있었다. 침대와 작은 소파, TV, 인터넷 공유기, 옷장이 갖춰진 방은 혼자 쓰기에는 큰 불편함이 없었다. 베란다에는 세탁기, 건조대가 있었고 철제 탁자와 의자 2개가 놓여 있었다. 나는 이 탁자와와 의자를 방 안으로 들여 식탁 겸 책상으로 사용했다.
후아힌에 도착한 이틀 후 힐튼 리조트(โรงแรมฮิลตัน หัวหิน รีสอร์ท แอนด์ สปา, Hilton Hua Hin Resort & Spa)에 갔다. 후아힌의 이 호텔은 2011년 2월에 내가 묵었던 작은 게스트하우스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해변과 마주보고 있는 야외 수영장이 인상적이었던 곳이다. 나는 그때 큰 창으로 보이는 야외 수영장을 리셉션이 있는 로비에서만 잠시 바라보다 나왔다. 그리고 내가 후아힌에 다시 올 때는 이 호텔에서 하루나 이틀이라도 묵어 볼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는 그 결심을 실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호텔 로비의 카페에서 차라도 마시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생각을 했다.
넓은 로비는 창밖으로 보이는 야외 수영장과 함께 그때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로비 한쪽으로 보이는 카페로 가 따뜻한 카페라테와 크로아상을 주문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PC를 올려놓고 작업하기 좋은 편안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라테는 적당히 씁쓸하고 구수한 커피에 부드러운 우유가 잘 어우러졌고, 크로아상은 살짝 데워져서 따뜻한 온기에 결이 잘 살아 있어 쫄깃한 식감이 좋았다. 그렇게 맛있는 커피와 후식을 먹고 블로그 글을 쓰며 네 시간 쯤을 보낸 후 카페 직원과 눈을 맞춰 결제하려는 의사를 표했다. 내게 다가온 직원은 큐알 코드가 있는 작은 리플릿을 건네며 힐튼 회원에 가입하면 할인이 된다고 알려 준다. 나는 그 자리에서 회원 가입을 했고 직원은 10%의 회원 할인을 적용해 결제해 줬다. 그렇게 할인을 받아 내가 지불한 금액은 278바트(≒₩10,600)였다. 직원의 친절한 서비스 덕분에 만원 남짓한 돈으로 나는 충분히 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내가 묵고 있는 라 카시타(La Cacita)와 힐튼 리조트 중간 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메리어트 리조트(Hua Hin Marriott Resort & Spa)가 있어서 가 보기로 했다. 이번에도 호텔 카페에서 블로그 작업을 하기 위해 노트북이 든 배낭을 메고 호텔 로비로 갔다. 걸어가느라 땀이 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카페로 가 크로아상과 함께 아이스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호텔 로비는 힐튼 호텔만큼은 아니었지만 공간이 널찍한 편이었고 좌석도 편안했지만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고 로비 양쪽의 문만 열어 놓아 후텁지근함이 말끔히 가시지는 않았다. 이곳에서도 나는 블로그에 올릴 글을 정리하면서 편안하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내가 먹은 커피와 크로아상 값으로 300바트(≒₩11,300)를 결제하고 나올 때 보니 각종 프로모션(promotion)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조금 전 결제를 해 준 직원에게 여기 뷔페가 어떠냐고 물으니 앰버 식당(Amber Kitchen)의 저녁 뷔페가 좋다며 추천했다. 그래서 나는 그와 함께 예약 카운터로 가 내일 저녁 뷔페를 예약했다.
다음 날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메리어트 리조트로 다시 갔다. 로비에서 어제 만났던 카페 직원에게 인사를 했더니 나를 알아보고 환한 미소와 함께 반가이 맞아 준다. 식당 위치를 물으니 로비 앞에 있는 수영장이 딸린 정원을 가로질러 가라고 한다. 로비를 나서니 양쪽으로 3층의 낮은 객실 건물이 바닷가 쪽을 향해 길게 뻗어 있고 가운데 긴 수영장과 잘 가꿔진 정원이 있다. 해가 지고 어스름이 짙어질 무렵이라 걸어 가는 길에는 불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객실 앞에 바로 놓인 수영장, 정원이 불빛과 어울어져 은은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길 끝에 다다르니 식당이 보였다. 입구에서 예약을 확인하고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뷔페 식사가 이제 막 시작되는 시간이라 실내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손님들이 채워졌는데, 가족 단위, 연인이나 부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처럼 혼자로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였다. 사실 일반 식당이 아닌 뷔페 식당에 혼자 가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처음에 나는 왠지 움츠러들고 다른 이들의 시선이 몹시 신경쓰였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여러 번의 경험으로 타인들은 혼자 온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혹시 있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수인가 하며 넘길 수 있을 만큼 단련돼 있었다.
나는 식탁에 앉아 내부를 한번 쓰윽 훑어보고 이내 음식이 차려진 곳으로 갔다. 전체적으로 메뉴가 다양하지는 않았지만 음식의 질은 좋아 보였다. 이탈리아 식당을 표방했으므로 태국 음식과 함께 이탈리아 음식이 주를 이루었다. 태국 쌀국수와 이탈리아 파스타는 즉석에서 만들어 주는 코너가 따로 있었다.
음식은 내 입맛에 잘 맞아 맛있었고 충분히 여유를 즐기며 식사를 했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니 여러 식탁에서 직원들이 손님의 사진을 찍어 주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직원이 내 식탁 주변을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나도 사진을 부탁했다. 그렇게 기념 사진까지 찍고 난 후 계산대로 갔다. 여기서도 힐튼에서와 같이 직원이 메리어트 회원 가입을 하면 할인을 해 준다고 안내해 준다. 나는 또 할인 유혹에 끌려 즉석에서 회원 가입을 하고 10%의 할인을 받아 결제를 했다. 그렇게 해서 세금, 서비스 차지를 포함해 내가 지불한 총 금액은 843.38바트(≒₩32,000)였다. 전날 카페에서는 회원 할인을 못 받아 좀 서운했지만 식당에서 이렇게 할인을 받으니 괜히 대접받는 것 같아 기분이 더 좋아졌다. 그렇게 나는 흐믓한 마음으로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길을 따라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