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촌언니와의 여행에서 마지막으로 도착한 도시는 태국 방콕(Bangkok)이다. 태국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는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 하나이자 현재 경제적으로 다른 주변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유한 나라이다. 더불어 방콕은 다양한 국적의 수많은 항공기들이 출입하므로 동남아시아 여행에서 허브 역할을 하는 도시라 할 수 있다. 방콕은 관광업이 국가 산업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태국의 수도이므로 숙박, 음식, 즐길거리 등 여행자들에게는 초저가에서부터 최고급까지 다양한 선택지가 있고, 왕궁이나 불교 사찰 등 역사와 현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볼거리도 많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할 수 없지만 내가 방콕을 처음 방문한 때는 약 26~27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온전한 배낭여행이란 걸 했었는데 방콕에서 육로로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로 넘어가기도 하고, 북부 지역인 치아마이, 치앙라이, 빠이도 갔었다. 그 이후로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또는 기회를 만들어서 태국 여행을 했는데 방문 횟수를 모두 합치면 열 번 이상은 될 것이다. 그래서 이번 여행의 끝에 태국을 계획했고 방콕은 돌아갈 항공편 때문에 필히 들러야 하는 도시가 되었다.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탄 비행기가 방콕 돈무앙 공항에 도착한 때는 오후 3시 무렵이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프롬퐁 역(Phrom Phong) 근처에 미리 예약해 둔 방콕 로터스 호텔(Bangkok Hotel Lotus Sukhumvit 33 by Compass Hospitality)로 갔다. 스쿰빗에 있는 이 호텔은 프롬퐁 역과는 도보 7~8분 떨어진 위치에 있어 이동에 큰 불편함이 없고, 조식 포함 3박에 약 $170($57/박≒₩78,000)로 가성비가 괜찮은 곳이다. 호텔 자체는 조금 오래 돼 낡은 구석이 없지는 않았지만 넓은 로비에 있는 실내 연못에는 호텔 이름을 상징하는 연꽃이 피어 있었고, 객실도 깨끗해서 전체적으로 잘 관리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방콕 도착 첫날은 다른 일정을 잡지 않고 오후 시간은 호텔에서 쉬다가 이른 저녁 무렵 호텔에서 나와 천천히 거리 구경을 하면서 아속 역으로 걸었다. 다음 날은 예약해 둔 투어가 있었는데,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해서 미리 만남의 장소인 로빈슨 백화점 1층 맥도날드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근처 쇼핑몰인 '터미널 21 아속' 푸드코트로 가서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하는 것으로 방콕 도착 첫날을 마무리했다.
우리가 예약한 '담넌사두억 수상시장 & 위험한 기찻길 시장 반일 투어'는 현지 한인 여행사인 '몽키트래블'을 통해 했는데, 한국어를 할 수 있는 태국인 가이드가 안내하는 투어였다. 사실 나는 몇 년 전 영어 가이드가 동행하는 같은 투어를 다녀왔기 때문에 별 흥미는 없었으나 여행이 처음인 언니를 위해 동행하기로 했다. 투어는 오전 7시 50분 아속 역 근처 로빈슨 백화점 맥도날드 앞에서 출발해 담넌사두억 수상시장, 위험한 기찻길, 기차 이동 후 차량으로 환승, 오후 1시 30분 무렵 아속 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담넌사두억 수상시장(ตลาดน้ำดำเนินสะดวก, Damnoen saduak floating market)은 방콕에서 남서쪽으로 약 100Km(차로 약 2시간 20분) 떨어진 랏차부리 지방에 있는 수상시장이다. 이곳은 1868년 담넌사두억 운하가 건설되면서 운하를 따라 시장이 생겨났다. 그 중 주요 시장이었던 '라드플리 시장(Lat Phli 또는 Lad Plee)'을 1971년 태국 관광청이 외국인을 위한 관광 명소로 만들었고, 1981년에는 톤 운하에 새로운 도로가 건설되면서 민간 기업들이 이 운하에 지금의 담넌사두악 수상시장을 설립했다고 한다. 주로 관광객들이 찾는 곳으로 간단한 먹을거리를 제외하고 시장 내 대부분의 상품 가격은 다른 곳에 비해 대체로 비싼 편이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작은 배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는데, 투어에 공지된 1인당 배 탑승료 150바트를 현금으로 지불하고 네 명씩 나누어 탔다. 양쪽으로 상점이 있는 번화한 시장을 조금 지나 왼쪽으로 방향을 돌리니 코코넛 아이스크림 가게 같은 몇 개의 작은 가게가 띄엄띄엄 있고 일상 생활을 하는 집들이 늘어선 한가한 풍경이 보였다. 어떤 집에는 망고나무가 있었고, 모든 집 앞에는 이곳 사람들의 유일한 이동수단인 작은 배들이 매어져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운하 한쪽을 ㅁ자 모양으로 돌아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왔다. 배에서 내린 이후에는 30~40분 정도 자유 시간이 주어졌는데, 우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노점에서 쌀국수 한 그릇을 사 먹고, 시장을 잠시 돌아 봤으나 가이드의 조언대로 물건을 사지는 않았다.
담넌사두억 수상시장에서 차로 20여 분쯤 차로 이동한 곳은 이른바 '위험한 기찻길 시장'으로 알려진 매끌렁 기찻길(철도) 시장(Maeklong Railway Market)이다. 이 시장의 원래 이름은 '탈랏롬허브(ตลาดร่มหุบ,Talad Rom Hub Market)'인데, 태국어로 'Talad'은 '시장', 'Rom'은 '우산', 'Hub'는 '폐쇄 또는 끌어내림'을 뜻하므로 '닫는(접는) 우산 시장'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 시장은 사뭇 송크람(Samut Songkhram) 주의 매끌롱 기차역 근처 철로 변을 따라 약 100미터 길이에 걸쳐 형성돼 있다. 주로 해산물, 야채, 과일, 육류와 기타 잡화를 판매하는 일반적인 시장이다. 그런데 대부분 상점의 가판대가 이 철로 옆에 바짝 붙어 있기 때문에 '위험한 기찻길 시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광고에 소개되면서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한다. 이 시장은 주로 현지인들이 생필품을 구매하러 오는 곳이므로 현지 시장의 활기찬 모습을 볼 수 있고 물건들의 가격도 대체로 싼 편이다. 우리는 시장 구경을 하다가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가게에 들어가 신선한 두리안을 사 먹었다.
시장 자체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기차가 들어올 때 벌어지는 진기한 광경을 보고 싶어 시간을 기다린다. 역에서 기차가 출발하거나 다가올 때가 되면 큰 종소리가 울리고 상인들은 철로 가까이 놓아 둔 바퀴 달린 가판대를 뒤로 물리고 신속하게 차양을 접는다. 그러면 기차는 아주 천천히 선로 위를 지나면서 시장을 통과한다. 기차가 지나간 후에 상인들은 바로 차양을 펼치고 가판대를 다시 원래 자리로 이동시킨다. 시장 사이로 기차가 지나는 이 전체 과정은 약 10분 정도로 마치 잘 훈련된 단체 체조(?)를 보는 것처럼 일사분란하게 일어난다. 기차가 지나는 시간이 짧고 장소가 협소하므로 여행객들의 자리잡기가 치열하니 미리 좋은 자리를 선점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기차가 시장을 한가운데를 통과한 후 우리는 매끌렁 역 앞으로 갔다. 방금 들어온 기차가 곧 떠나는데 우리는 그 기차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번에 투어로 이곳에 왔을 때는 기차를 타는 체험은 할 수 없어 조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이 기차를 타 볼 수 있게 되었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기차역으로 오니 친절한 우리 가이드는 기찻길 앞에서 기념 사진도 찍어 주고 과일 한 봉지도 건네 준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가이드에게서 받은 기차표를 받아들고 대기하고 있던 기차에 올랐다. 좌석은 정해져 있지 않아서 창문쪽으로 붙어 앉아 이번에는 기차 안에서 시장을 통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기차 안에서 보니 기찻길 한쪽으로 따닥따닥 붙어 서서 열심히 사진을 찍는 사람들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 우리 모습이 저렇게 보였겠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피식 웃음이 났다. 기차 안과 밖의 사람들은 서로 손을 흔들어 주었고, 우리는 약 세 정거장을 지나 기차에서 내려 다시 투어 차로 옮겨 탄 후 방콕으로 돌아왔다.
참고로 시장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영업을 하고 있다. 또 기차는 하루에 8번씩 이 시장을 통과하는데, 현재 매끌렁 기차역의 열차 시간표는 다음과 같다. 투어를 이용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간다면 이 열차 시간에 맞춰 가서 시장도 구경하고 기차도 타 보면 좋을 듯하다.
- 매끌렁역 도착 열차 : 08:30, 11:10, 14:30, 17:40 (막차)
- 매끌렁역 출발 기차 : 06:20, 09:00, 11:30, 15:30
오전 투어를 마치고 저녁에는 방콕의 야경도 보고 저녁 식사도 하기 위해 바이욕 스카이 호텔(โรงแรมใบหยกสกาย, Baiyoke Sky Hotel)로 갔다. 사전 예약은 클룩, KKday, 와그 등 여행 액티비티 플랫폼이나 마이리얼트립, 트리플 투어 등 다양한 여행 사이트에서 할 수 있다. 호텔과 함께 전망대와 식당 등 각종 시설을 갖추고 있는 바이욕 스카이 호텔 빌딩은 '빠뚜남(Pratunam) 시장' 근처에 있다. 우리는 지상철을 타고 공항 철도와 만나는 '파야 타이 역(Phaya Thai)'에서 내려 걸어 갔다. 그런데 구글이 가르쳐 준 길은 빠르기는 하나 철로도 건너야 하고 건물 사이의 작은 샛길도 지나야 해서 해가 진 저녁 시간에 가기에는 많이 낯설고 위험했다. 만약 혼자 가는 초행 길이라면 그랩(Grab)으로 오토바이나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쨌든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 70대 언니의 불편한 시선을 의식하면서 약 15분 이상을 걸었다.
드디어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불빛이 환한 시장이 나타났고, 이 시장을 지나 드디어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1층에 창구가 있어서 미리 구매한 바우처를 보였더니 81층 뷔페 식사권과 전망대 관람권을 준다. 예약한 식사 시간보다 20분 정도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먼저 77층 실내 전망대로 갔다. 내부에 들어서서 한 바퀴를 빙 둘러 걸으면서 방콕의 화련한 야경을 감상했다. 그리고 360도로 자동 회전하는 전망대가 있다는 84층으로 올라갔다. 사실 시내 전망을 볼 수 있는 방법은 호텔 투숙(76층 ~ 82층에 위치해 있다)을 하거나, 뷔페 식사 티켓만 구매해도 가능하다. 하지만 굳이 전망대 티켓까지 구매한 이유는이 회전 전망대에 와 보고 싶어서였다. 83층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듬성듬성하게 구멍이 뚫린 철조망이 쳐진 외벽을 따라 바닥에 납작하게 눌러 놓은 도넛 같은 철판이 돌아가고 있다. 그 위로 올라서니 천천히 바닥이 움직이면서 서서히 방콕의 야경이 바뀌었다. 야외라 실내에서 유리창 너머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멋진 풍경이었다. 우리는 그저 감탄을 연발하며 바라봤다.
바이욕 스카이 뷔페는 건물 내 76, 78, 81, 82층 등 여러 곳이 있는데, 음식의 종류나 분위가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우리는 그 중 후기가 괜찮았던 81층 뷔페로 예약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니 음식은 중앙에 빙 둘러 놓여져 있고 대부분의 좌석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창가 쪽으로 배치돼 있었다. 그래서 방콕의 야경을 내려다 보며 식사할 수 있다. 사실 처음 방콕을 방문한 것이 아니거나 도시 전경을 보는 데 큰 관심이 없다면 굳이 전망대 티켓까지 살 필요는 없다. 어쨌든 우리는 84층에서 내려와 적당한 위치에 있는 2인용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음식은 일반적인 뷔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해산물(Seafood) 뷔페였으므로 조개류, 오징어, 새우 등을 구워 주는 코너가 따로 있었고, 쌀국수, 팟타이 등 태국 음식과 딤섬이나 베이징덕(Peking Duck)같은 중국 음식도 있었다. 음식은 전체적으로 무난했으나 그날 우리는 오전에 투어를 한 탓에 조금 지쳐 있어서 그랬는지 많이 먹지는 못했다.
태국은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 국가이므로 우리나라에는 없는 왕이 현존하고 있다. 아마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현대의 왕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그래서 방콕 여행에서 꼭 빼놓지 않고 방문해야 할 곳이 바로 왕궁이 아닐까 한다.
방콕 왕궁(Grand Palace)의 태국어 정식 명칭은 '프라보롬마하랏차왕(พระบรมมหาราชวัง)'이다. 1782년 라마 1세 때 수도를 톤부리에서 방콕으로 옮기면서 건축이 시작되어 18세기 이후부터 국왕이 머물렀던 공식 관저였다고 한다. 여러 번의 증축 공사를 통해 계속 확장되었는데, 직전 왕이었던 현 국왕의 아버지로 2016년 서거한 '푸미폰 아둔야뎃(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 왕은 이곳에 머물지 않고 '찟라다 궁(พระตำหนักจิตรลดารโหฐาน, Chitralada Palace)'을 관저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니 현재는 이 왕궁에 태국 국왕이 살지 않고 관광객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우리는 아침에 호텔을 나와 그랩으로 차를 불러 왕궁 앞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여러 사람들이 달려들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순간 당황해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이들의 얘기는 지금 기도 시간이라 왕궁 안에 들어갈 수 없고 2시간 이후에 다시 와야 한다는 거였다. 내가 의심스러워 하니까 이들 중 한 사람이 목에 건 증표를 보이며 자신들은 여기 정식 직원이라는 말을 한다. 그러면서 2시간 동안 강 건너 보이는 왓아룬(새벽사원) 투어를 하고 오란다. 옆에는 이 투어를 담당할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순간 인도 뉴델리 역 앞에서 겪었던 비슷한 경험이 떠올라 이건 사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럼 투어는 하지 않고 2시간 후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그 사람들을 피해 왕궁의 외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벽을 따라 조금 걸어 오른쪽으로 모퉁이를 돌아가니 너른 광장이 나타났다. 그런데 한쪽에 느닷없이 지하로 오르내리는 계단과 에스컬레이터가 보인다. 한낮의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지쳐 있었던 터라 일단 그늘로 들어가고 싶어 지하로 내려갔다. 안은 밖의 찌는 듯한 더위를 한 순간 싹 날려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곳은 지하에 만든 광장으로 곳곳에 긴 벤치가 있어서 더위에 지치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쉼터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출입구 근처에는 가드들이 배치돼 있었고, 한쪽에는 안내 데스크도 있었다. 나는 우선 안내 데스크에서 왕궁 입장권을 살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물었다. 그는 우리가 들어왔던 곳에서 대각선 맞은편으로 올라가 왕궁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를 통과하면 매표소가 있다고 안내해 준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 지금 내부에 무슨 행사가 있느냐, 몇 시부터 들어갈 수 있느냐 물었더니 그런 건 없다고 한다. 역시 내 추측대로 조금 전 만났던 우리가 사람들은 투어를 강매하려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당황스러웠던 호객행위를 뿌리치고 입장권을 사기 위해 왕궁으로 들어갔다. 문을 통과해 매표소 안내 표시를 따라 가다 키오스크를 발견했다. 키오스크는 잘 작동돼서(?) 나는 두 장의 입장권을 쉽게 구매할 수 있었다.
차오프라야 강변을 따라 위치한 왕궁은 사면을 높은 벽이 둘러싸고 있고, 여러 번의 증축 공사로 점차 확장돼 왔기 때문에 내부는 여러 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왕궁은 크게 외정, 중정, 내정, 에메랄드사원 이렇게 4개의 구역으로 구분된다. 각 구역별로 왕실 사무처와 정부청사, 에메랄드 사원, 왕실 사찰 등 종교시설 밀집 지역 등이 나누어져 있다.
입구로 들어서자 한쪽에 여러 나라 언어로 쓰인 안내 리플렛(Leaflet)이 있었는데 그 중 한국어도 보였다. 이 리플렛에는 왕궁의 전체 조감도와 각 건물의 위치, 용도 등이 설명돼 있었다. 왕궁 안으로 들어서니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이 눈앞을 가로막아섰다. 우리는 차례로 건물의 위치를 확인하고 리플렛의 설명을 읽으면서 꼼꼼하게 보고 싶었으나, 날이 너무 더운 탓에 곧 포기하고 말았다. 다만 화려하고 섬세한 건물 곳곳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고, 일정한 순서 없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대충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사촌언니와 함께 한 이번 여행에서 방콕은 3박 4일 일정이었지만, 언니의 아시아나 항공 비행기의 출발 시간이 오전 1시 10분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비행기 출발 전날 저녁이 방콕을 떠나야 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그래서 오전에 왕궁을 둘러보고 호텔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우리는 마지막 저녁 식사를 위해 프롬퐁 역 앞의 엠쿼티어(เอ็มควอเทียร์, EmQuartier) 백화점으로 갔다. 미리 검색해 둔 식당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6층 '힐렉스 스카이 다이닝(Helix Sky Dining)'이라는 식당가 층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푸릇푸릇한 식물들이 곡선을 따라 장식돼 있었고, 아래에서 위로 솟는 작은 분수도 있어서 전체적으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우리는 깝카우 깝쁠라( กับข้าว กับปลา, KUB KAO KUB PLA) 식당으로 갔다. '밥과 생선'이란 뜻의 이 식당은 여러 곳에 체인점이 있는데 가격은 조금 비싼 편이지만 여행의 마지막 식사인 만큼 제대로 갖춰진 괜찮은 식당으로 가고 싶었다. 예상 외로 식당은 그리 크지는 않았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좌석에 앉고 메뉴판을 받았다. 나는 싱가포르에서 먹었던 칠리크랩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태국의 대표적인 게 요리인 '풋팟퐁커리(ปูผัดผงกะหรี่)'와 언제나 실패 없는 메뉴인 공심채볶음을 밥과 함께 시켰다. 풋팟퐁커리는 우리말로 '커리 게 볶음' 이라 할 수 있는데, 살짝 튀긴 게를 달걀, 코코넛을 넣은 커리 소스에 볶아낸 요리이다. 게 딱지를 발라내고 속살만을 사용해 요리해 나온 풋팟퐁커리는 언뜻 양이 적어 보였지만 공심채, 밥과 함께 두 사람이 먹기에는 충분했다. 당연히 진한 게 향과 함께 게 속살의 맛이 풍부해서 느껴졌고, 커리 소스와 잘 어울어져 부드럽고 달큰한 뒷맛까지 아주 맛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두리안을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서는 두리안과 망고스틴의 객실 반입이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매고 갔던 가방에 조심스럽게 두리안을 넣어 방으로 들어갔다. 방금 전 식사를 했기 때문에 두리안은 공항에 가서 먹기로 했다. 방에서 잠시 쉬다가 시간에 맞춰 캐리어를 챙기고 차를 불러 언니와 나는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항상 교통체증으로 시달리던 방콕답지 않게 신호에 대기하는 일도 거의 없어서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밤 9시 무렵이었는데 체크인 창구 앞에는 이미 몇 명이 줄을 서 있었다. 우리도 가방을 갖고 20여 분쯤 기다렸는데, 직원인 듯한 사람이 보여 물어보니 창구는 10시에 연다고 한다. 그래서 언니 가방을 뒤에 있던 사람에게 잠시 부탁하고 우리의 마지막 두리안을 먹기 위해 공항 문밖으로 나왔다. 비록 문밖에서 바닥에 쪼그려 앉아 먹어야 했지만 다행스럽게 이번에도 두리안은 여전히 맛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원 없이 두리안을 먹었다.
다시 대기 줄로 돌아와 체크인을 기다렸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고 짐을 부치고 보딩패스도 받았다. 이제 언니와 함께 한 열흘 간의 여행은 여기서 종료된다. 마지막으로 출국 심사를 위해 들어가는 언니를 배웅하고 나는 공항 지하로 내려가 공항열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