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럽/2021년 12월 그리스

그리스 미케네 고고 유적, 나플리오 팔라미디 요새

12월 19일(일) 나플리오(Nafplio)미케네(Mykene) (7,900보 / 4.8km (1시간 / 53km))

 

  • 나플리오(Nafplio) 숙소 → 미케네(Mykene) → 팔라미디 요새(Fortress of Palamidi) → 숙소

나플리오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먼저 약 24km 떨어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미케네 문명 유적지를 찾아갔다. 유네스코 유산 정식 명칭으로는 미케네·티린스 고고 유적(Archaeological Sites of Mycenae and Tiryns)인 이 지역은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이 발견한 미케네 문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신화로만 여겨졌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Ilias)'와 '오디세이아(Odysseia)'를 어린 시절부터 역사로 믿었던 그는 1871년 지금의 터키에서 트로이 유적을 발굴해 트로이 전쟁이 역사였음을 입증했다. 이후 1876년에는 호메로스가 '길이 넓고 황금이 넘쳐나는' 도시로 묘사했던 미케네에서 고분 속 황금 유물들을 처음 발굴해 냄으로써 이곳이 미케네 왕족의 무덤이었음을 밝혀냈다.

BC 2000년경 크레타 섬과 그 주변 그리고 그리스 본토 미케네 등지에서 융성했던 문명이 에게 문명(Aegean Civilization)이다. 발달된 해상 교통으로 소아시아와 이집트 등의 선진 오리엔트 문명을 받아들여 에게 해 주변에서 발달한 청동기 문명이다. 에게 문명은 그리스의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한 미노스 문명(Minoan civilization, 또는 크레타 문명)을 전기로, 본토 미케네 지역을 중심으로 한 미케네 문명을 후기로 나눈다.

크레타 섬 크노소스를 중심으로 크레타 문명이 번성할 무렵인 BC 2000~1600년에 그리스 본토에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그리스인들이 북쪽에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BC 1600년경부터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미케네, 아테나이, 티린스, 필로스 등의 왕국을 건설하고 힘을 키워 크레타가 지배했던 에게 해 지역을 점령하고 크레타 문명을 멸망시킨다. 이후 이들은 미케네를 중심으로 번영을 누리며 미케네 문명을 이루었는데 대체로 BC 1600년부터 BC 1100년까지의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멀리 보이는 미케네 성채)

미케네가 해상 무역으로 번영을 누리고 융성해진 BC 1193년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그리스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꾀어 간 것을 발단으로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에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Τρωικός Πόλεμος, Trojan War)이 벌어진다. 아내를 빼앗긴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다시 왕비를 찾아 오기 위해 형인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에게 도움을 청하고 아가멤논은 그리스 연합군을 결성하여 총사령관으로서 트로이 원정길에 오른다. 약 10년 간 지리하게 계속되던 이 전쟁은 '트로이의 목마'로 인해 최종적으로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트로이 전쟁의 상세한 발발 원인과 배경에 대해서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양쪽의 주장이 각각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헬레네를 데려간 것이 전쟁의 발단이 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미케네와 관련하여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이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가멤논(Άγαμέμνων, Agamemnon) 왕이다. 그는 패전국 트로이에서 많은 전리품들(이중에는 그가 첩으로 삼은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도 있었다.)을 싣고 개선 행렬을 이끌고 다시 미케네로 돌아온다. 그렇게 아가멤논은 환호하는 수많은 미케네 인들과 그리스 연합군 병사들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왕궁의 입구인 사자의 문(Lion Gate of Mycenae)을 통과해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축제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 승리의 함성이 채 사라지기도 전 귀향한 바로 그날 밤 아가멤논은 자신의 아내 클리템네스트라(Κλυταιμνήστρα, Clytemnestra)에게 살해당하고 만다.(일설에는 클리템네스트라의 정부 아이기스투스가 살해했다고도 하고 아내와 정부가 함께 죽였다고도 한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아가멤논과 처음부터 원치 않는 결혼을 했으나 네 명의 자녀를 낳는다. 그런데 트로이로 원정을 떠날 때 안전한 항해를 위해서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인신 공양을 해야 했는데 아가멤논은 첫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 제물로 삼았다. 이 사건으로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가 아가멤논이 전장에서 돌아온 날 복수를 감행한 것이다.

미케네 성채의 입구인 사자의 문(Lion Gate of Mycenae)은 BC 1350년 경의 것으로 두 개의 기둥 위에 가로로 놓인 상인방(上引枋, 창문 위 또는 벽의 위쪽 사이에 가로지르는 나무나 돌로 창이나 문틀 윗부분 벽의 하중을 받쳐 준다.) 위에 부조로 새겨진 두 마리의 사자가 마주보고 있다. 현재 사자의 머리는 볼 수 없으나 양쪽 기둥, 상인방, 사자 부조가 각각 하나의 거대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성벽과 이어진 이 문에 쓰인 어마어마한 돌의 크기 때문에 땅과 하늘의 아들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가 성채를 쌓았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미케네 성채의 입구 사자의 문)

 

사자의 문을 지나 성내로 들어서면 낮은 경사로가 언덕 꼭대기 왕궁까지 쭉 이어져 있다. 그 길을 따라 사자의 문을 뒤로 하고 몇 걸음을 옮기면 오른쪽에 원형의 왕족 무덤이 보인다. 1876년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처음 발굴한 곳이 바로 이 원형의 무덤이다. 그는 여기에서 황금 가면을 발견하는데 이 무덤을 아가멤논의 무덤이라 여겼던 그는 그 가면을 '아가멤논의 황금 가면'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 이 무덤은 사자의 문과 성벽이 만들어졌던 BC 1350년 경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것은 곧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의 시대보다 약 150년 전 왕족들의 무덤이라는 뜻이 된다. 비록 아가멤논의 무덤은 아니었으나  이곳에서 6개의 벌집 형태의 톨로스(Tholos) 무덤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서 금으로 싸인 시신 19구와 많은 황금 유물들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들은 유적지 근처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슐리만이 아가멤논의 무덤이라 믿었던 원형의  왕족 무덤)

원형의 무덤을 지나 경사로를 계속 따라가면 언덕 정상에 다다른다. 큰 규모로는 보이지 않지만 왕궁은 현재 그 흔적 정도만 남아 있고 큰 돌들로 쌓은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또 주변에는 신전, 창고 등 여러 개의 부속 건물들이 있었던 흔적들도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지하 저수조가 인상적이었는데 입구의 계단을 내려가 들어가 보니 규모가 꽤 컸다. 안에는 깊이 5m의 저수조가 있다고 하니 저수 용량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외에도 우물이 있던 흔적도 있고 근처 계곡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비밀 수로도 건설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물 관리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주변에는 왕족이나 귀족들이 목욕을 할 수 있는 시설도 완비돼 있었다.

(↑왕궁으로 오르는 길, 언덕 위에 지어진 왕궁의 터)
(↑왕궁 뒤편의 북쪽 출입문과 물 저장고 입구)

우리는 왕궁은 둘러보고 다시 경사로를 내려와 이곳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으로 갔다. 미케네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아가멤논의 황금 마스크(Προσωπείο του Αγαμέμνονα, Mask of Agamemnon)일 것이다. 슐리만이 굳게 믿었던 대로 아가멤논의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아가멤논의 황금 마스크'로 불린다. 이 외에도 황금 마스크는 여러 개가 발견되었는데 모두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본떠 만든 데드 마스크로 귀쪽에 홈을 파 사자의 얼굴에 고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아가멤논의 황금 마스크는 진품이 아니고 진품은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나는 황금 마스크가 듣던 것과는 달리 너무 소박하고 입체감도 없어서 잠시 실망(?)했다. 그건 아마 몇 년 전 이집트에서 봤던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가 떠올랐기 때문일까? 투탕카멘의 마스크가 아가멤논의 마스크보다 200년 쯤 후의 것이라고 해도 그것에 비하면 단순하기도 하고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선사의 모나리자'라는 별칭을 얻은 이 마스크를 많은 사람들은 간결하고 사실적인 표현이 주는 세련미가 있다고 평가한다. 작품의 아름다움이나 가치는 보는 이의 눈에 달렸다.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순수한 눈으로 있는 그대로를 보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야겠다. 내가 보지 못했던 이 유물의 아름다움을 다시 생각해 본다.

(↑미케네 유적지의 전체 모형과 토기 유물들)
(↑황금 가면과 금 세공품)

우리가 둘러본 왕궁을 중심으로 한 유적지는 성벽 내부 쪽이었는데 언덕의 남서쪽으로는 아이기스토스(Aegisthos)의 무덤, 클리템네스트라(Clytemnestra)의 무덤이 있는 또 하나의 무덤 군과 왕의 집무실로 추정되는 4개의 건물이 있었던 터가 있었는데 아쉽게도 우리는 이쪽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 우리는 미케네 성채에서 약 500m 가량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유적인 아가멤논(Agamemnon)의 묘 또는 아트레우스의 보물 창고(Treasury of Atreus)에 가 보기로 했다.

아트레우스는 미케네가 가장 번성하던 시기의 왕이자 아가멤논 왕의 아버지이다. 이곳은 원래 그의 무덤인데 이미 많은 보물들이 도굴된 상태로 발견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처 도굴되지 않은 일부 부장품이 발굴되어 보물 창고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또는 슐리만은 이곳이 파우사니아스가 말한 아트레우스의 보물창고라고 생각했다는데 실제 여러 구의 시신이 발견되어 무덤임을 확인했다고도 한다.) 그리고 이곳이 아가멤논의 묘(Tomb of Agamemnon)라고도 불리는데 실제 아가멤논이 묻혔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트레우스의 보물 창고는 사자의 문 건축 시기와 같은 것으로 미케네 건축물 중 가장 뛰어난 유물로 인정받고 있다. 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잘 다듬어진 돌벽돌로 쌓은 폭 약 6m, 길이 약 30m 쯤 되는 길을 지나야 하는데 이 길을 '드로모스(Dromos)'라고 한다. 이 통로 끝으로 가면 출입문이 있는데 이 문의 위(삼각형 바로 아래)에 가로로 놓인 유난히 큰 돌인 상인방이 있다. 120톤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무게의 이 돌을 당시에 어떻게 12m 높이의 문 위로 올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 거대한 돌의 무게가 내리누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인방 위의 벽체를 삼각형으로 파내 하중을 줄이는 공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내부 공간은 같은 크기의 돌을 조금씩 안쪽으로 둥글게 33단으로 쌓아 꼭지점에서 마지막 돌로 구멍을 덮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너비 13.2m, 높이 14.5m의 이 공간의 전체 모양은 마치 고깔 모자를 엎어 놓은 것과 같다. 당시의 기술로는 내부의 천장을 로마 판테온과 같은 반구의 둥근 모양으로 만들지는 못했다고 하나 지금으로부터 약 3,500여 년 전의 건축임을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사실 서양 건축은 이러한 원형 공간을 축조하기 시작하면서 사각형 중심에서 벗어나 차별화 되고 진일보한 단계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아트레우스의 보물 창고의 입구 드로모스와 출입문)

트로이 전쟁에서 돌아오던 날 밤,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와 정부 아이기스투스에 의해 살해된 아가멤논은 어디에 묻혔을까? 그리고 이 비극적인 죽음을 미리 예언했던 트로이의 공주이자 아가멤논의 새 애인 카산드라도 함께 죽임을 당했는데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 있을까?  클리템네스트라와 정부 아이기스투스에 의해 아가멤논이 살해된 이후 아이기스투스는 미케네의 왕이 되었고 클리템네스트라는 아이기스투스의 두 딸도 낳는다. 그러나 7년 간 멀리 도망가 있던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Orestes)는 아버지를 죽인 자들을 죽이라는 신탁을 받고 돌아와 누나인 엘렉트라(Ἠλέκτρα, Electra)와 함께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투스를 죽인다. 이들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죽임으로써 복수를 했지만 그 원수가 그들의 어머니였으니 패륜을 저지른 것이다. 한 가족 안에서 아버지가 딸을 제물로 바치고 어머니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다시 자식들이 어머니를 죽이는 비극이 계속된 것이다. 이 가족의 비극이 종지부를 찍게 되었을 즈음 당대를 호령했던 미케네의 운명도 점차 그 기운을 잃고 사그라들게 되었다. 

 

아가멤논 왕의 이러한 가족 비극의 이야기는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가 모두 극으로 쓸 만큼 매력적인 소재였다. 이들은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가 어머니와 정부를 죽인 사건에 특히 관심을 두었다.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스 3부작’,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가 모두 자식들이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죽임으로써 복수하는 데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다.

이 이야기와 관련하여 정신분석학자인 칼융에 의해 만들어진 '엘렉트라 콤플렉스'란 용어는 딸이 아버지에게 강한 소유욕적인 애정을 품으면서 어머니를 경쟁자로 인식하고 질투하거나 적대시하는 경향을 말한다. 이에 앞서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아들이 어머니를 이성으로 사랑하여 아버지와 같은 남자가 되려하는 동일화가 강하게 일어나는 경향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했다.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바로 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여아에게 일어난 것으로 쓴 용어이다.

(↑메케네 성채에서 바라본 풍경)

 

미케네에서의 오전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나플리오로 돌아왔다. 나플리오(Ναύπλιο, Nafplio)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골리다 만에 위치한 인구 약 14,000명 정도의 작고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다. 이 도시는  베네치아와 터키에 여러 차례 점령되었다가 1822년 독립전쟁에 의해 그리스 령이 되었다. 이후 1829년~1834년까지 근대 그리스의 첫 수도였던 역사적 의미가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또 2019년에 방영된 드라마 '초콜릿'의 배경이 된 적이 있어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나플리오에서 가장 높은 곳인 팔라미디 요새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팔라미디 요새(

Φρούριο Παλαμηδίου, Fotress of Palamidi)​는 나플리오의 동쪽 216m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요새로 베네치아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1711년~1714년에 지어졌다. 원래 해안가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요새였으나 한때는 죄수 수용소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니만큼 이곳에서 보는 마을과 바다 풍경은 눈을 시원하게 틔워 줄 만큼 아름답다.

(↑팔라미디 요새)
(↑팔라미디 요새에서 바라본 풍경)

참고로 우리는 렌터카로 이 요새에 올라갔지만 차가 없는 여행자라면 걸어서 올라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도보 여행자가 가로길러 오를 수 있는 길이 있기는 하다. 다만 990개의 단을 딛고 올라야 입구에 다달을 수 있다고 하니 계절이 여름이라면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것 같다.

 

 

 

◈ 일일 경비: €126.21/3(≒₩56,500)

입장료(미케네 유적지 및 박물관 18€, 팔라미디 요새 €12) €30 차 기름 €50.71, 오렌지(10kg) 4€,

점심(Pidalio Tavern 문어, 스테이크&라이스, 로켓샐러드, 빵 33.5, 팁3) €36.5, 커피&차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