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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2021년 8월 이탈리아

로마 4일 판테온, 콜로세움, 캄피톨리오 박물관

2021년 8월 17일(화) 콜로세움, 캄피톨리오 박물관(약 1만5천보, 8km)

  • 판테온 내부 관람 > 콜로세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 대전차 경기장 > 팔라티노 언덕 > 포로 로마노

 

오늘은 콜로세움을 예약한 날이라 오전에 이틀 전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내부 관람을 할 수 없었던 판테온으로 먼저 갔다. 예약 없이 입장이 가능하다고는 했으나 사람들이 많을 것을 예상해서 오전에 일찍 나선다고 했는데 도착하니 이미 9시 반이 지나고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늘어선 사람들의 줄은 이미 광장을 반 바퀴쯤 돌아 어느 골목으로 안으로 한참을 들어가니 끝이 보였다. 30~40분쯤 줄에서 대기하다 내부를 볼 수 있다면 11시 30분에 예약된 콜로세움 입장은 이동 시간을 고려한다고 해도 크게 빠듯하지는 않을 듯 싶었다. 그러나 8월의 뙤약변 아래 줄은 쉽사리 줄어들지 않았고 결국은 한 시간이 조금 넘게 대기한 끝에 겨우 내부를 볼 수 있었다. 마음은 이미 콜로세움까지 이동을 생각하면서 조급해져 있었다.

(↑길게 늘어선 입장 대기 줄)

 

판테온(Pantheon)은 기원 전 27년에 다신교 국가였던 로마에서 모든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신전으로 지어졌는데 이름 그대로 만신전(萬神殿)이다.(판테온은 그리스어 ‘판테이온(Πάνθειον, 모든(παν) + 신(θεος))에서 유래한 말로, '모든 신을 위한 신전'이라는 뜻) 원래의 판테온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가 세웠는데, 아그리파의 판테온은 기원 후 80년 로마 대화재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후 125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판테온을 재건했는데 현재의 건물은 바로 이때 재건된 것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판테온을 재건할 당시 아그리파에 대한 존중의 뜻으로 원래 판테온에 있던 라틴어 명문을 건물 정면(파사드)에 그대로 새겼다. 이 명문은 'M·AGRIPPA·L·F·COS·TERTIVM·FECIT'는 '루시우스의 아들인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세 번째 집정관 임기에 만들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판테온 정면 열주 위에 새겨진 명문)

판테온은 바닥에서 돔 꼭대기까지의 높이와 돔 내부 원의 지름이 모두 43.3m으로 같아서 판테온의 내부는 지름 43.3m의 거대한 가상의 공을 넣어 놓은 것과 같다.  또한 돔의 꼭대기는 원형 지붕이 완전히 덮히지 않은 상태로 있는데 이는 당시 건축 기술로는 이 구멍을 덮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큰 비가 오지 않는 한 건물의 문을 닫고 안에서 제사 의식을 할 경우 더운 공기가 내부의 공기를 위로 밀어 올려 돔 내부에는 비가 들지 않았다고 한다. 또 큰 비가 오는 경우를 대비해 내부 바닥에 빗물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배수 구멍을 뚫어놓았다.

(↑판테온 내부. 돔 천장(가운데)과 바닥의 배수 구멍)

판테온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돔 형태의 건축물로 알려져 있으며 브루넬리스키가 피렌체 대성당을 설계할 때 이 판테온을 참고했다고 한다. 또한 미켈란젤로는 판테온을 일컬어 '천사의 디자인(설계)'이라 했고, 라파엘로는 생전에 이 판테온에 묻히길 원했는데 실제 소원대로 내부에 그의 무덤이 있다. 판테온은 현대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미국 국회의사당 건물이다. 규모면에서도 판테온은 미국 국회의사당의 중앙돔보다 크다고 한다. 만신전으로 지어진 이 건축물은 7세기 이후부터는 로마 가톨릭 성당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현재 판테온 내부에는 여러 개의 경당이 있으며 벽감 등에는 가톨릭 관련 조각상이나 프레스코화 등이 남아 있다.

(↑바위의 성모(Madonna del Rock, 라파에로의 제자 로렌초 로티(Lorenzo Lotti)의 작품이다.) 아래 있는 라파엘로의 무덤)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자비의 성모 마리아 경당, Cappella della Madonna della Clemenza)

 

판테온 내부 관람을 마치고 겨우 예약 시간에 맞춰 콜로세움에 도착했다. 이틀 전에 로마 시내 일부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거리에서 멀리 보기는 했지만 막상 입구에 도착하니 거대한 규모에 압도되었다. 오래 전 교과서에서 아무 감흥 없는 문자로만 무작정 외워야 했던 세계사의 한 페이지에 있었던 그 로마가 지금 내 눈 앞에서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하나 둘 살아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콜로세움(Colosseum, 콜로세오Colosseo)이라는 이름은 네로 황제의 동상(colossus)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래는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이었다고 한다. 또한 ‘거대하다’는 뜻의 콜로살레(Colossale)와 어원이 같다는 설도 있다. 서기 72년에 폭정을 일삼던 네로 황제가 축출된 후 즉위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황제의 화려한 황금 궁전(도무스 아우레아)과 인공 호수, 정원이 있었던 자리에 원형 경기장을 짓기 시작했고, 8년 후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완공했다.

콜로세움은 원형 경기장으로 지어진 만큼 주로 전쟁 포로인 검투사들과 맹수들의 목숨을 건 싸움이 잦았고 동물 사냥이나 신화의 재연, 바닥에 물을 채워 하는 모의 해전 등 다양한 행사들을 열어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다고 한다. 모두 4층으로 이루어진 계단식 관중석은 신분에 따라 경기장과 가까운 아래층 좌석은 왕이나 귀족들의 차지였고 신분이 낮을수록 경기장과 먼 위층의 좌석을 배정받았다. 콜로세움은 행사가 있을 때 수만 명의 관중이 효율적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80개의 아치형 출입구에는 각각 번호가 매겨져 있었고 관객들은 도자기 파편에 새겨진 입장권의 좌석 위치를 보고 좌석에서 가까운 출입구를 이용할 수 있었다. 즉 당시 로마에는 이미 현재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행사가 있을 때 관객들이 입출입하는 방식을 도입해 80개의 출입구에서 동시에 관객들이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에 수만명의 입장과 퇴장이 짧은 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콜로세움 내부)
(↑물을 댈 수 있었던 수로와 대기실이 있던 지하)
(↑복원된 당시의 계단식 관중석(왼쪽), 대부부의 관중석은 무너진 상태로 있다)

콜로세움에 대한 내 첫인상은 거대함이었는데 실제 이 건축물은 길이 189m, 너비 156m, 외벽의 높이는 48m, 둘레는 545m였던 것으로 추정된다.(현재는 지진으로 한쪽 남쪽 벽이 완전히 무너져 있다.) 경기장 내부의 무대는 타원형 구조로 길이가 87m, 너비가 55m이다. 건축 재료는 석회암, 응회암, 콘크리트가 사용되었고, 건축적으로는 층마다 외벽을 빙 둘러 만들어진 수십 개의 아치(arch) 구조 문 덕분에 하중이 분산돼 안정적이라고 한다. 5만에서 8만 명까지 관중을 수용했다는 규모가 여간해서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서울의 잠실 야구장의 관중 수용 규모가 약 3만 정도라고 하니 실로 놀라운 규모이긴 하다.

콜로세움은 완공 이후 여러 번의 개축과 증축을 거쳤다. 그런가 하면 수세기 동안 강도나 약탈, 다른 건물을 짓기 위한 석재 채취와 같은 인간의 파괴 행위와 화재, 지진 등으로 많은 부분이 손상된 채로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2층과 3층의 아치에는 원래 신화 속 인물들의 조각상이 있었으나 현재는 몇 개의 걸개그림이 대신 걸려 있다. 또한 1349년의 대지진으로 남쪽 벽이 무너졌고 북쪽 벽만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콜로세움은 로마의 상징으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연간 700만명에 이르는 이탈리아 대표적인 관광 명소다. 나는 2021년 이 700만 명 중 한 명이 되었다.

(↑콜로세움 외부. 2층 아치에 원래 있었던 동상 대신 걸개그림이 있다.)

 

콜로세움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콘스탄티누스 개선문(Arco di Contantino)이 있다. 고대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나 왕을 기리는 뜻으로 개선문을 만들어 주던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한 때 로마에는 36개의 개선문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티투스 개선문(AD 81),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AD 205)과 콘스탄티누스 개선문(AD 312) 등 세 개만이 남아 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즉위 10년에 원로원이 세웠는데,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밀비안 다리(Milvian Bridge)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 사건은 기독교 공인과 로마 제국의 통일에 획기적인 것이었다고 하는데 개선문의 부조(浮彫)에는 그때 싸움 장면이 생생하게 조각돼 있다. 또한 이 개선문은 아피아 가도(Via Appia)의 시작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과 콜로세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Arco di Contantino)

 

대전차 경기장(키르쿠스 막시무스 Circus Maximus)은 팔라티노 언덕이 바라보이는 곳에 있는데 지하철 콜로세오 역에서 한 정거장 거리에 있다. 길이 621m, 너비 118m 규모로 약 15만 명의 군중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로마 제국 당시 지어진 가장 오래되고 큰 경기장으로 알려져 있다. 복원된 상상도에 따르면 원래 경기장 중앙에는 분리대가 있었고 가운데 이집트에서 가져온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있었다. 현재 그 오벨리스크는 포폴로 광장으로 옮겨져 있고 시설은 거의 허물어져 흔적만 남아 있다.

(↑대전차 경기장(키르쿠스 막시무스  Circus Maximus))

 

원형경기장에서 포로 로마노와 팔라티노 언덕을 오르는 경사로를 따라 가면 멋스러운 개선문 하나가 눈앞에 버티고 서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세 개의 개선문 중 가장 오래된 티투스 개선문(Arco di Tito)이다. 이 개선문은 티투스 황제의 승리를 기려 건립한 것으로 높이 15.4m, 폭 13.5m, 두께 4.75m로 다른 개선문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웅장한 느낌을 준다. 티투스 황제는 서기 70년에 2년 간의 전쟁 끝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유대인 항쟁을 완전히 진압했다. 티투스는 이 전쟁에서 많은 유대인을 죽였고,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웠다. 이때 겨우 파괴를 모면한 서쪽 벽은 오늘날까지 남아 '통곡의 벽'이 되었다.

(↑티투스 개선문 Arco di Tito)

 

팔라티노 언덕(Palatino)은 로마의 탄생과 관련된 역사적 의미가 있는 7개의 언덕 중 하나이다. 특히 이곳은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늑대와 함께 발견된 곳이어서 가장 핵심적인 언덕이며 로마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구역이다. 또한 높이 약 40m 정도로 그리 높지는 않고 당시 로마의 중심지였던 포로 로마노(Foro Romano)의 남쪽과 연결돼 있다. 이곳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황궁이 있었으며 귀족들의 저택들이 많았는데, 이 언덕에서 대전차 경기장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황제와 귀족들의 주거지였던 탓에 로마 멸망 후 약탈이 많이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대부분의 건물과 시설들이 무너져 현재는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참고로 '궁전(palace)'이란 단어는 이 '팔라티노(Palatino)'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많이 훼손된 상태로 흔적만 남아 있는 팔라티노 언덕의 유적들)

 

팔라티노 언덕과 이어진 포로 로마노(Foro Romano)는 '로마인의 광장'이란 뜻으로 영어로는 Roman Forum이라고 한다. 포로 로마노는 카피톨리노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중앙 광장으로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293년까지 로마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팔라티노 언덕(좌)과 캄피톨리오 언덕에서 바라본 포로 로마노(Foro Romano) 전경)

포로 로마노는 신전, 포럼, 원로원 의사당, 바실리카(Basilica는 원래 고대 로마인들의 공공건물을 일컬었다.) 등 로마의 중요한 건축물이 집결돼 있었던 장소여서 원정에서 돌아온 황제들의 개선식부터 공공 연설, 선거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열렸다. 로마에 세운 최초 사원과 여러 개의 신전이 있었으며, 왕궁,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정부 청사와 같은 곳으로 로마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회의가 열렸던 율리우스 바실리카(Basilica Guilia), 신성한 불을 지키는 베스타 신전(Temple of Vesta), 베스타 여사제들의 거처, 로마에 남아 있는 세 개의 개선문 중 하나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Arco di Settimio Severo) 등이 모두 이 곳에 있었다.

참고로 로마를 건국한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어머니인 레아 실비아(Rhea Sivia)가 불의 여신 베스타의 여사제였기 때문에 로마 곳곳에는 베스타의 신전이 많이 세워졌는데 이곳의 베스타 신전도 그 중 하나라고 한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포로 로마노 가는 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Arco di Settimio Severo 좌 중앙), 베스타 신전(Temple of Vesta 좌 앞쪽 세 개의 기둥), 사투르노 신전(Tempio de Saturno 우 앞 여덟 개의 기둥))

 

오늘 일정 중 마지막으로 간 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 중 하나라는 카피톨리니 미술관(박물관, Musei Capitolini)이다. 둘쨋날 들렀던 캄피돌리오 광장(Piazza del Campidoglio)의 양 옆으로 있는 두 개의 건물 콘세르바토리 궁전(Palazzo Conservatori)과 누오보 궁전(Palazzo Nuovo)을 합친 것이다. 두 궁전은 지하로 연결되어 있어 서로 반대편 건물로 이동할 수 있다. 전시물은 주로 15~18 세기에 교황들의 수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로마 패스로 무료 또는 할인 입장이 가능한데 매표소는 광장 중앙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o Aurelio)의 모조 기마상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있는 콘세르바토리 궁전(Palazzo Conservatori)에 있다.

(↑다시 찾은 캄피톨리오 광장)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바로 들어가면 나오는 건물 안쪽 마당에 거대한 조각상의 신체 부위들이 전시돼 있다. 약 4 세기 경에 만들어진 이 조각상의 주인공은 콘스탄티누스 2세 황제라는데 원래 크기는 10미터쯤 됐을 거란다. 아쉽게도 지금은 두상과 손, 발 등 신체 일부만이 남아 있다.

마당에서 나와 건물 안으로 올라가면 박물관의 1층(우리로는 2층에 해당) 중앙 홀 전시실에 이곳의 대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조각상들을 볼 수 있다. 그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감피돌리오 광장 중앙에 있던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Statuaequestre Marco Aurelio)' 진품이다. 보존을 위해 야외 광장에는 모조품을 실내 전시실에 진품을 전시해 놓았다. 

말과 인물의 얼굴 등에 금색 흔적이 남은 것은 원래 금 도금이 되었던 때문이고 작품의 제작 시기는 166년에서 180년 경으로 추정한다. 이 작품은 두 대상인 말과 인물의 정교한 묘사뿐만 아니라 오직 말의 세 다리로만 조각상를 지탱하고 있는 구도로도 높이 평가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기마상은 이후 많은 기마상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이 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유명 작품 중 하나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있는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Romulus and Remus)를 형상화한 청동상이다. 이 작품의 정식 명칭은 '카피톨리노의 암늑대(Lupa Capitolina)'라고 한다. 원래 이 작품은 기원전 5세기경 작품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13세기 작품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로마 건국 신화에 의하면 군신(軍神)인 마르스가 레아 실비아에게 첫눈에 반해 잠들게 한 후 낳은 두 아들이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이다. 실비아의 삼촌이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인 실비아를 여사제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들은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됐다. 그러나 다행히도 테베레강에 버려졌으나, 늑대의 젖으로 자라다가 양치기 파우스툴루스에게 발견되어 양육되었다. 형제는 외할아버지 누미토르의 복위를 도운 뒤 새로운 도시 로마를 건설하였으나(BC 753) 이후 반목하여 도시의 신성한 경계를 넘었다는 이유로 형 로물루스는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로마의 초대 왕이 된다.

내부 전시실에는 고대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가시를 뽑는 소년상(Spinario Cavastina)'이다. 내 예상보다는 그리 크지 않은 이 청동 소년상은 레니즘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발에 박힌 가시를 뽑는 소년의 안쓰러운 모습이 섬세하게 묘사돼 있다.

(↑로마의 상징 늑대의 젖을 먹고 있는 로물루스와 레무스(좌), 가시를 뽑는 소년상 Spinario Cavastina)

1층 전시실에는 이 외에도 수많은 조각 작품들이 있는데 그중 부조가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부부의 석관', 베르니니의 '메두사 두상'도 볼 수 있다. 참고로 메두사 두상은 내 예상보다 크기가 너무 작아서 하마터먼 그냥 지나칠 뻔했다.

(↑부부의 석관(좌), 메두사 두상)

2층은 주로 회화 전시실인데 르네상스부터 바로크 시기까지의 유명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림에 문외한 나로서는 그저 사전에 들어 알고 있는 몇 작품을 중심으로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카라바조 '점쟁이(La Buona Ventura)'(좌), 점자 설명이 있는 그림 )
(↑벽면 한 쪽을 가득 채운 프레스코화)

매표소가 있는 콘세르바토리 궁전(Palazzo Conservatori)에서 맞은편 전시관인 누오보 궁전(Palazzo Nuovo)으로 가려면 지하 통로를 이용해야 한다. 이곳을 찾지 못해 계단을 몇 번 오르내리면 한 동안 헤맸었다. 이 박물관에서 눈 여겨 볼 또 하나의 조각상이 있는데 바로 비너스 상이 있기 때문에 꼭 

(↑두 건물을 잇는 지하 연결 통로(에피그라픽 갤러리))
(↑누오보 궁전 안 마당에 있는 마르포리오(Marphurius, Marforio) 조각상(좌), 켄타우로스 조각상이 있는 1층 그레이트홀)

누오보 궁전에서 가장 눈여겨 볼 작품은 2층 47번 방의 '카피톨리노의 비너스(Capitoline Venus)'이다. 이 작품은, 그리스의 청동상 원본을 대리석으로 복제한 것으로 2세기 중엽에 만들어졌다. 의식을 위해 목욕을 준비하는 모습인데 살짝 몸을 웅크린 채 두 손으로 가슴과 국부를 가리고 있는 정숙한 포즈로 아예 요부 논란이 일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특별히 이 자세는 ‘푸디카 베누스’(정숙한 비너스)로 불린단다. 나는 이 조각상에서 여성의 신체가 보여 주는 건강하고 탄력 있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있었으나 미의 여신이라는 비너스의 얼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남성의 얼굴과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작품에 대한 평가만큼의 가치를 충분히 느끼지 못했다. 나중의 일이지만 나는 그리스 아테네 박물관에서 익숙한 비너스의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전시관을 거의 다 돌아 나오면서 본 작고 예쁜 남녀 조각상이 눈에 띄었다. 바로 '큐피트와 푸시케(Cupid and Psyche)'였다. 미의 여신 비너스(아프로디테)의 아들이자 사랑의 신 큐피드는 보는 이들의 경배의 대상이 될 만큼 아름다웠던 인간 푸시케를 보자 첫눈에 반한다. 신인 자신의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큐피드는 밤마다 푸시케를 찾아오지만 호기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푸시케는 큐피드의 정체를 알게 된다. 이후 자신에 대한 불신에 실망한 큐피트는 푸시케를 떠나 방랑하던 중 진정한 용서를 깨닫고 돌아와 푸시케를 불멸의 상징 나비의 신으로 만들고 행복하게 살았다 한다. 

(↑큐피트와 푸시케(Cupid and Psyche))

두 건물의 전시관 관람을 마치고 나와 간 곳은 야외 테라스가 있는 카페다. 매표소가 있는 콘세르바토리 궁전(Palazzo Conservatori) 쪽을 바라보고 오른쪽의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 건물 출입구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곳에서는 성베드로 성당이 멀리 보인다.

(↑카페 야외 테라스와 테라스에서 바라본 풍경)

 

<1일 지출 내역> 29.5€(40,500원)

-교통: 옴니아카드(로마 패스)

-입장료: 옴니아카드(로마 패스), 2€(콜로세움 예약비)

판테온 무료, 콜로세움((16)+2).캄피톨리오 박물관(로마패스 무료)

-식비: 27.5€

물 2병 3, 과자 1.5, 저녁(동태 매운탕 15, 서울식당), 젤라또 8€(작은 상자, 파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