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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2013년 2월 필리핀

2013년 2월 필리핀-바나웨(Banaue)

2013년 2월 15일(금) 맑음

07:00 바나웨 도착

08:00 하프웨이 롯지(Halfway Lodge) 숙박비 400p
13:00 HAPAO 입장료 10p

14:00 HIWANG 입장료 20p
15:00 BANAUE Wiew Point 기부 20p
16:00 트라이시클 대여료 900p, 시손(Sison) 버스 티켓 300p, 물 2개 30p
17:30 저녁(밥, 야채볶음) 75p
18:20 PC 인터넷 25p
19:30 파인애플 주스 40p, 과자 18p

 

  밤새 달린 버스 안에서 해가 비쳐들고 창밖을 보니 차는 어느 새 산길을 구비구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중간 중간 마을이 나타나자 통로에 앉자있던 현지인 2명이 내렸다. 버스는 정확히 7시 바나우에 Ohayami transe 터미널에 선다. 일순간 버스에서 내린 승객들과 호객 행위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트라이시클 기사들이 함께 몰리면서 좁은 주차장은 정신없이 번잡하다. 짐을 찾고 잠시 정신을 차리자 이미 여행객의 반 이상은 사라지고 없다.
  순간 한 청년이 다가와 어느 호텔로 가느냐고 묻는다. 그린뷰라고 하자 녀석이 갖고 있던 명함을 보이며 자기가 거기 직원이라며 가잔다. 그리고는 내 가방을 들고는 트라이시클에 싣는다. 그 와중에 트라이시클 기사와 녀석의 얼굴을 살핀다. 이 젊은 녀석은 뭔가를 계속 씹고 있는데 이가 붉게 물들어 있고 인상이 썩 미덥지는 않다. 반면 트라이시클 기사는 순한 인상에 뒤에 서서 말이 없다. 아마 녀석은 호텔이나 이 트라이시클 기사에게 나를 소개해 주고 구전을 챙길 모양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마을은 그리 멀지 않아 200~300미터 쯤 내려가니 서양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몰린다는 몇 개의 숙소들이 늘어서 있는 길이 보인다. 내가 찾던 그린뷰로지(Greenview Lodge)나 Stairway Inn은 가족실 외는 방이 없단다. 결국 녀석을 따라 좀더 아래에 있는 Halfway Lodge에서 겨우 400페소 방 하나를 구한다. 방을 구하고 나자 이 녀석의 정체가 드러난다. 녀석은 로비 벽에 크게 그려진 이 지역 지도를 가리키며 투어를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녀석은 나를 함께 온 트라이시클 기사에게 넘기고 구전을 챙기려는 것이었다. 결국 녀석에게 이끌려 오늘 한 나절 투어를 900페소에 하기로 한다. 가방을 방까지 들어다 주고 가며 선금 200페소를 먼저 달란다. 다소 의심스러웠으나 기름값이라는 말에 그냥 주고 11시에 로비에서 만나기로 한다.
  세수도 하지 않은 채로 일단 한숨 자고 나니 10시 20분이다. 가방을 다시 챙겨 로비로 가니 기사만 와 있다. 이름이 짐(Jim)이라는 녀석은 어디 있냐고 하니 오지 않는단다. 그래서 오늘 투어를 얼마에 가기로 했느냐니 700페소라고 한다. 그것도 아까 녀석의 말과는 달리 한 곳만 들른단다. 나는 900에 세 곳을 가기로 했고 선금 200을 그 녀석에게 주었노라고 했다. 기사도 속은 듯했다. 아침에 내렸던 버스정류장으로 가 티켓 부스에 있던 아줌마에게 사정 얘기를 했더니 일단 알겠다며 기사에게 700 페소만 주라고 한다. 다소 찜찜하긴 했지만 오늘 투어는 그렇게 시작됐다.
  먼저 간 곳은 거리가 꽤 먼 곳으로 산길을 오르내리며 40분 이상을 달렸다. 길은 반은 포장이 돼 있고 나머지는 중간 중간 공사 중이거나 비포장으로 남겨져 있어 트라이시클로 가기에 수월하지 않았다. 가는 길에 기사 아저씨는 지나던 아이 둘과 아주머니에게 말을 건내더니 아내와 딸이란다. 나는 아이들을 불러 세워 사진을 찍어 주고 땅콩 과자도 하나 주었다. 인상 좋은 젊은 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간다. 기사는 산길을 계속 달리며 몇 군데 사진 찍을 만한 곳에 세워 지명을 알려 주긴 했으나 다 기억할 순 없고, 최종 목적지는 하파오(Hapao)라는 곳이다. 마을 입구에서는 입장료 10페소를 받고 등록도 한다. 얼마 전에 모를 심어 놓아 논이 녹색을 띈다. 마을의 최종 전망대에는 몸집이 작은 할머니가 기념품 가게를 지키고 있다. 인사를 건네는 할머니에게 웃으며 인사하고 가게 안을 언뜻 둘러보았으나 살 만한 것이 없다. 다 마신 빈 물병을 보이며 물이 있느냐니까 마침 그마저도 없단다. 아쉽지만 별 도움도 주지 못하고 사진만 찍고 돌아선다.

(트라이시클 기사 버나르 씨와 그의  예쁜 두 딸)

(하파오(Hapao) 마을 입구와 등록하는 곳)

하파오(Hapao)

 

  왔던 길을 다시 돌아오는 동안 나는 피곤이 몰려와 잠시 졸았다. 눈을 떠 보니 마을을 완전히 벗어나 히왕(Hiwang)이란 곳에 다가가고 있었다. 이 마을은 이푸가오족의 전통 가옥이 남아 있고 일부는 관광객을 위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었다. 목조로 지어진 이들의 가옥은 더운 지방의 집 형태가 대체로 그렇듯 땅위에 바로 건물을 짓지 않고 사다리나 계단을 놓아 지면에서 일정 간격을 두고 방을 만들었다. 방안에는 솜씨 좋게 조각한 목각 인형들이 전시돼 있다. 그리고 전망이 좋은 곳으로 올라가 사진을 찍으려면 20페소를 내야 했다. 관광지라 이미 전통은 상품이 돼긴 했지만 사람들은 아직 순수하고 소박했다. 웃음을 잃지 않고 사람들을 맞고 인사를 건네는 이들의 웃음에는 아직 선함이 그대로 남아 있다. 수줍음을 타는 손자를 안고 있던 아저씨에게 즉석 사진을 한 장 찍어드렸더니 아주 좋아하신다. 

히왕(Hiwang)

(수줍은 손자와 할아버지)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는 바나우에 View Point다. 이곳 바나우에 라이스테라스는 추수가 끝나고 논을 다듬는 시기라 모는 볼 수 없지만 경사가 급한 논둑을 다듬거나 보수 작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보통 성인 남자 키의 두 배는 돼 보이는 높은 곳에 좁은 논을 만들고 물을 대는 작업을 하는 사람도 보인다. 가는 길에는 몇 군데의 전망대가 있는데 기사 아저씨가 세워 준 한 곳으로 가니 이푸가오 전통 복장을 하고 있는 한 할아버지가 목각 인형과 자전거를 세워 놓고 사진을 찍으라고 한다. 한편에 보니 작은 기부함은 있으나 지키고 앉은 할아버지는 관심도 없는 듯하다. 20 페소를 드리고 즉석 사진을 찍어드리니 환하게 웃으시며 좋아하신다. 특히 배경으로 하늘과 산, 논이 잘 나왔다며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신다.

  다시 Main view point로 이동한다. 이곳 논들이 비록 오래 전 이푸가오족들이 쫓겨 이 가파른 산에 만들어지긴 했지만 다행하게도 이 산 곳곳에 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 큰 축복이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록 힘겹고 어려운 일이긴 해도 물이 마르지 않으니 그들의 주업인 논을 만들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으리라. 전망대 한쪽에서 도르레로 저 아래 논으로 돌을 실어 나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높은 곳에서 도르레를 설치해서 작게 고른 돌들을 실어 내리면 아래에서 논둑을 고르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참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그러니 2천 년이 넘게 이 논을 일궜으리라. 다시 전망대 표지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니 할아버지 한 분과 네 분의 할머니들이 역시 전통 복장을 하고 앉아계신다. 이분들께도 사진을 드렸더니 역시 크게 좋아하신다. 독사진을 받아들고 이가 빠진 입안을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참 천진스럽다. 이런 곳에서 내 즉석 카메라는 잠시나마 사람들을 즐겁해 주는 문명의 이기임에 틀림없다. 

(전통 옷을 입고 계신 할아버지)

(저 아래에서 논둑을 다듬는 작업을 하고 있다.)

 

  버스 정류장에 돌아와서 내일 비간을 가기 위해 중간 목적지까지 가는 표를 미리 사고 트라이시클 기사와 헤어진다. 아침 11시에 시작한 투어가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아침에 잠시 잠을 자기는 했지만 꽤 피곤하다. 미안한 마음에 200페소를 가져간 녀석을 꼭 잡고 싶다고 하며 700페소를 주고 기사 아저씨와 정산을 마쳤다. 마지막으로 아저씨에게도 즉석 사진 한 장을 선물로 드렸더니 역시 좋아하신다. 기사 아저씨와 헤어진 후 천천히 걸어 마을을 둘러본다. 가게도 있고 인터넷 카페도 있고 트라이클도 엄청 많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숙소로 돌아오니 아, 200페소를 떼 먹은 그 녀석이 와 있다. 대뜸 200페소 어쨌느냐니까 조금 전에 기사를 만나 주고 오는 길이란다. 내가 못미더워하며 거짓말쟁이라고 하자 아니라며 자기는 분명 200페소를 아저씨에게 줬단다. 아마 약간의 수수료를 챙기고 기사와 정산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오늘은 즐겁고도 피곤한 하루였다.

 

2013년 2월 16(토) 맑음

09:30 Halfway Lodge 체크아웃

12:00 여행기 작성

12:30 그린뷰 식당 점심(돼지고기 야채볶음, 밥, 커피) 175p
15:10 물 20p
16:30 바나웨 오하야미 버스 터미널 도착

16:55 바기오 행 버스 출발
20:30 휴게소 과자 21p

 

  느긋하게 일어나 보니 7시 40분쯤 지나고 있다. 짐을 어지럽게 늘어놓은 채 앉아 내일 여행지 비간 정보를 챙기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체크아웃 시간이란다. 시계를 보니 9시다. 보통 여행자들을 실은 버스가 이른 새벽에 도착하니 체크아웃 시간이 이른 모양이다. 간단하게 세수만 하고 짐을 챙겨 나온다. 로비는 이미 손님들로 붐빈다. 짐을 끌고 레스토랑 안쪽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아 어제 마무리하지 못한 여행기를 쓴다. 이틀분의 마닐라 여행기를 끝냈더니 12시가 넘었다. 이곳 Halfway에서는 와이파이가 영 신통치 않아 와이파가 잘 된다는 위쪽 그린뷰(Green View Lodge)로 간다. 식당에 앉아 돼지고기 야채 볶음을 주문하고 와이파이부터 연결한다. 답답하던 와이파이가 겨우 잡힌다. 물론 속도는 답답한 수준이지만. 일단 얼른 비간 호텔 예약 메일을 캡처하고 두어 군데 카톡 메시지도 보낸다. 사진 한 장을 보내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다.
  점심을 먹고 커피도 한 잔 느긋하게 마신 후 1시 반이 지나 식당을 나선다. 어제 돌아본 방향과 반대로 길을 내려가 마을로 들어선다. 작은 다리를 하나 건너자 학교가 보인다. 안으로 들어서니 한쪽에선 농구, 배구를 하고 차양을 친 안쪽에는 사람들이 모여 무슨 식을 하고 있다. 입구에서 단체복을 입고 있는 대학생들 중 여학생 하나가 함께 따라가며 설명을 해 주겠단다. 이 여학생은 근처의 대학에 다니고 있는데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이 학교에 와 무슨 프로그램의 일종인지 자원봉사를 하고 있단다. 내가 교사라 학교에 관심이 많다며 이것저것 묻자 친절하게 답해 준다. 오늘은 오전 수업을 마치고 발렌타인 데이를 즈음해 학부모들이 와서 가족의 날 행사를 하는 중이란다. 식을 마치면 학생들은 다시 오후 수업을 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인다. 교실 안을 둘러보니 낡긴 했어도 우리네 교실과 별 다를 것이 없다. 필리핀의 학제는 초등학교 6년, 고등학교 5년, 대학교 4년의 체제란다. 그리고 이곳 이푸가오 지역은 생각보다 꽤 규모가 큰 지역이라 초, 중등학교가 5~6개씩 있고 대학도 있단다. 친절히 설명해 준 여학생과 헤어지며 기념으로 즉석 사진 한 장을 선물한다. 

(마을 전경)

(학교와 안내해 준 에쁜 아가씨)

 

  다시 마을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어제는 그저 먼 곳에서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만 보았던 마을을 느린 걸음으로 둘러보니 작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꽤 물살이 센 개울물, 아슬하게 걸린 철제 다리, 깨끗하게 널어놓은 빨래, 담벽 위에 예쁘게 장식한 꽃 화분, 흩어져 돌아다니며 수시로 울어대는 닭들, 추수 후 빈 논들이 좀더 가깝게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이 마주치면 'Hello' 인사를 건네며 환하게 웃어주는 아이들, 한가롭게 앉아 느린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 미쳐 추수를 끝내지 못한 논에 나와 마지막 수확을 거두는 농꾼 부부... 이방인인 내게 이들의 일상은 참 여유롭고 평화롭게만 느껴진다. 요즘들어 부쩍 든 생각이지만 나는 늘 뭔가 계획하고 빠듯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증 같은 것이 있었던 듯하다. 늘어진 오후의 햇살 같은 느린 시간을 그저 즐기며 살 수 있는 삶, 나는 오늘 하루 그런 삶을 꿈꾸어 본다. 


(마을 안에서)

 

  Halfway로 돌아와 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벌써 4시가 다 돼 간다. 다시 짐을 챙겨들고 Ohayami 버스 정류장으로 간다. 어제 표를 사며 알아본 대로 5시 바기오 행 버스를 타기로 한다. 가는 도중 시손(Sison)에 내려 비간 행 버스를 다시 타야 하므로 기사에게 표를 보여 주며 꼭 시손에서 비간 행 버스를 탈 수 있는 곳에 내려달라는 부탁을 한번 더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차 안은 10명도 차지 않고, 출발 시각 5시도 지키지 않고 4시 55분이 되자 버스는 출발한다. 느리게 산길을 돌아내려오는 동안 버스는 사람들이 손짓하며 선 곳마다 다 서서 사람도 싣고, 짐도 싣고, 무슨 편지도 건네받는다. 어차피 내려오는 버스를 타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굳이 정류장까지 올라오지 않고 시간 맞춰 기다리다 타는 모양이다. 거기에 물건도 실어주고 소식도 전하는 것이리라. 덕분에 운전석 옆 차장은 아예 문을 열어둔 채 분주하게 움직인다. 잠시 우리나라 시골에도 아직 이런 버스가 다니는지 궁금해진다. 


(내가 탄 버스와 터미널 매표소)

 

  이 낡은 버스(지금은 없어진 우리나라 아시아 자동찬가? Asia Moter라는 글자가 창에 아직 그대로 새겨져 있다.)는 한 시간 이상을 달려 산길을 벗어나 도시로 들어서자 사람들을 가득 싣고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옆 자리에 아이를 안은 엄마가 앉는 바람에 시종 불편해서 잠이 드는 둥 마는 둥 흔들리다 차장의 '시손'이란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시손임을 한번 더 확인하고 내려보니 휑한 길이다. 그런데 차장이 가리키는 손끝을 보니 길 건너 버스 터미널이 있다. PARTAS라는 글자가 새겨진 몇 대의 버스들 중 다행히 비간(Vigan) 행이 있다. 차장을 찾아 짐을 싣고 버스에 올랐다. 시계를 보니 12시 45분이다. OHAYAMI 버스보다는 상태가 꽤 좋아 에어컨도 그야말로 빵빵하다. 그런데 동남아 대개의 나라에서 그렇듯 이곳 사람들도 버스 안이 아무리 추워도 에어컨을 절대 끄지 않는다. 이런 버스에서는 집에서 입고 왔던 얇은 오리털 점퍼가 오늘도 꽤 유용하게 쓰인다. 그래도 실내가 추워 커튼으로 에어컨 바람 구멍을 막은 후에야 겨우 앉아 갈 수 있었다.